[전규찬 in 타루트 ⑦] 세계의 아나운서들은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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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가을에 제법 긴 편지 쓰는 여유를 잡아보네. 어찌, 이 글 읽어 볼 틈이 있겠는가? 자네 얼굴 못 보고 이곳으로 후딱 떠나왔는데, 벌써 두 달이 지났구먼. 그간 어찌 별고가 없었겠나. 에스토니아에서 나는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네, 짧은 시간 그래도 둘러보며 체험한 이야기, 하고 싶은 말들이 제법 많아졌다네. 어제는 이곳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표를 했는데 그 소감을 전하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오늘 아침에 들린 빵집에서 마주친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렵게 연명해가는 노인들 이야기에 관해 적어 봐도 괜찮겠다 싶네. 인류학자들은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시장탐방을 빠트리지 않는다는데, 이곳의 다채로운 시장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타르투 대학의 기호학자 로트만 이야기는 또 얼마나 흥미로운지. 아이, 마음 급하지만, 이 모든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겠네.

자네, 자네들 아나운서에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네. 만사를 제치고서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러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주 불편할 것만 같아서 말이야.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아. 남의 일일 수가 없지. 동지. 이 말을 전하지 않으면 자네에게, 자네 동료들에게 너무 결례가 될 것 같아. 나중에 아주 미안할 것 같아. 고마워. 정말로 잘했어. 마이크를 놓았구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구나. 감사를 표하고 싶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더 이상의 굴욕과 환멸은 안 된다. 아나운서의 자존심을 다시 찾겠다. 그 결심 단호히 행동에 옮기는구나. 멋진 자네. 망가진 공영방송, 무너진 뉴스 룸, 파괴된 저널리즘의 현장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며, 촛불혁명의 명령을 쫓아 방송적폐를 반드시 청산하겠다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지. 그 노동중단, 파업의 대오에 섞인 자네들은 참으로 아름다우이. 그 말 하고 싶어서.

▲ 타루트 인근 구소련 전술비행장의 현재 모습 ⓒ전규찬 교수 제공 

자네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꽤 오래된 일이거든. 프리랜서화가 막 시작될 때야. 아나운서협회에서 나보고 특강을 해 달라는 거 있지. ‘언론인으로서의 방송 아나운서의 역할 제고’, 제목이 대충 뭐 이런 것이었어. 자네도 잘 알다시피 삐딱한 나잖아.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렇게 내질렀지. 대체 언제 적 이야기 하냐고. 참으로 언론인 같은 아나운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허명과 신화로 계속 버티려 하면 안 된다고. '우리말 전도사‘ 같은 전문가 윤리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거라고. 패러다임이 바뀌었어. 광폭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방송 아나운서들도 시장주의의 압박에 시달릴 거고, 프리랜서 상품화는 대세며,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도 피할 수 없는 유혹이 될 거라 했지. 방송국에 남은 아나운서들조차 마이크 앞 말하는 로봇기계의 신세를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 강도는 더욱 높아질 거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돼. 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맞서 대안의 양식을 모색하는 생각 있는 아나운서노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 강연의 요지였어. 십년 전의 이야기야. 별로 재미없어 하더군.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거야. 나도 좀 어색하긴 했지. 그래도 참 좋은 분들이더군. 내가 어찌되었든 자기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받아주는 눈치였어. 어쩌면 은근히 뜻이 통했던 건지도 몰라. 아무튼 그 기회에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나운서들과 약간은 가까워질 수 있었지. 그렇게 익힌 얼굴들을 이후 KBS MBC 방송총파업 현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 감동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네. ‘교수님’ 하면서 아는 체하고 반겨주는데, 막 동지 같고 꼭 식구처럼 느껴졌어. 감정이 참 이상해지더라고. 무척이나 반갑더라고.

▲ 타루트 인근 구소련 전술비행장의 현재 모습 ⓒ전규찬 교수 제공

깊은 정감이 생기더라고. 인연, 연대? 아, 지금도 그때 모습이 선하네. 지금 그들은 다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내가 쓴 이전 글들 중 파업현장의 아나운서에 관한 게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단체행동에 결합한 아나운서들의 뒷모습. 강렬한 인상이었어. 방송현장 아나운서가 택한 또 다른 현실적인 길이었어. 그때 좀 특별한 감정 표현으로 독자들의 욕을 좀 봤지. 하하, 편애라나? 상관없어. 괜히 고결해 보이는 환상의 직종 안에 머무는 대신에 추악해져가는 현실방송/방송현장 속 부정한 권력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자네 선배들은 진정 사랑스러웠어. 너무 멋졌어. 아나운서도 언론인이 될 수 있다, 아나운서가 언론노동자로서 활동하는 그런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 바꾸도록 한 게 바로 그들이었어.

자네도 마찬가지로 내게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아나운서 중 한 명이야. 더 이상 무늬만 공영방송인 방송국 마이크 앞 대본 읽는 기관으로 태평스레 청춘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작심했지. 자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잖아. 살아있는 말 만들기, 말하는 입 되기. 다시 공부해 보고 싶다며 결심하고 불쑥 나타난 자네가 내 눈에는 정말 환상적이었어. 멋진 학생, 공부하려는 삶이었어. 평안을 버리고 불안을 택한, 정주하지 않고 운동하는 아나운서. 그땐 촛불 이전 각하의 시절. 사실 공영방송 절망의 시기였는데, 뭔가 반짝 희망이 비치는 듯 했어. 내가 아는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더라고. 진지하게 자네와 같이 공부했던 시간, 재미나게 자네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공간, 그리고 자네가 국문학도로 돌아가 쓰고 아나운서로서 만들어 발표한 그 진심의 라디오 다큐멘터리 소리. 지금도 난 그 모든 걸 잊을 수가 없네.

▲ 타루트 인근 구소련 전술비행장의 현재 모습 ⓒ전규찬 교수 제공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어. 무능한 각하가 쫓겨나고, 권력의 음모가 탄로 나고, 부역한 종자들이 속속 역사의 법정에 불려나오고 있네. 민중이 승리하자, 공영방송을 다시 만들려는 기세 또한 드높네. 많은 방송노동자들이 모욕의 시간을 청산코자, 공영방송독립을 자기 손으로 이뤄내 역사에 용서를 구하고자, 힘차게 일어났네. KBS와 MBC 운동의 또 하나의 대폭발이네. 그 힘찬 대오에 자네도 당연히 함께 하는 중인가? 마이크를 끄고, 아니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마이크 곁을 떠나, 거리로 나선 아나운서들 사이에 아 자네의 얼굴이 보이네. 함께 기자회견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며, 용기를 내 발언하는 그 아름다운 현장에도 자네의 자취가 언뜻 비치네. 앞서 자네가, 그 전에 자네 동료·선배들이 보여줬던 참되고 진실한, 용감하고 아름다움은 결단의 모습. 그걸 자네가, 자네들이 다시 보여줘 너무 고맙네.

“신동호는 자신이 아나운서 국장으로 재직했던 지난 5년간 아나운서 국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였다”고 사실을 적시하는 자네들은 이미 훌륭한 언론인이야.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아나운서들 입에 재갈을 물려 ‘자유롭게 말할 권리’마저 빼앗은 것”을 지적할 때,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생명인 언론자유를 심각하게 가로막은 폭거이며 더 이상 신동호 스스로 언론인이기를 포기한 만행으로 간주”한다고 비판할 때도, 자네들은 정말 멋진 언론노동자야.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우리 내부의 대오각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저 멋진 생각이라니. 선생은 자네들이 꼭 승리해 공영방송을 바로세우고 아나운서의 명예도 되찾길 바라네. 그때 자네의 멋진 목소리 제대로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또 보도록 하세. 세계의 모든 아나운서들은 단결하라!

▲ 타루트 인근 구소련 전술비행장의 현재 모습 ⓒ전규찬 교수 제공

하하, 좀 과했나? 아, 이글 중간의 것들은 분투하는 자네와 자네 동료들에게 전하는 며칠 전 아주 드문 청명한 날에 찍은 이곳 사진들일세. 사실 타르투는 미소 냉전대결의 시절 무시무시한 소련 전략비행기지가 있었던 곳이야.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 에스토니아 독립 후, 냉전체제 해체 후, 이곳의 시설은 대부분 철거가 되고 약간의 전해만 흉물처럼 남아 있어. 영원한 체제는 없어. ‘모든 딱딱한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단순히 역사의 아이러니라 치부해 버릴 수는 없어. 진리로 새겨들어야 해. 사진 속 드넓은 공터가 평화로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어. 일부는 에스토니아 국립 박물관 터가 되지만 말이야. 변화에서 희망을 봐. 서울의 가을 색과 어찌 좀 다르게 느껴지는가? 나의 작은 선물이야. 자네 여행 좋아하지 않나. 약간의 위로가 되길 비네. 건강하고. 평등 평화 평온.  

 

언론 개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는 현재 연구를 위해 에스토니아에 머물고 있습니다. 공영 방송의 정상화, 독립 PD의 처우 개선 등 언론계 뿌리 깊게 박힌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전 대표가 에스토니아에서 보내온 소중한 글을 전합니다. <편집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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