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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in 타루트⑧] 장터에서 에스토니아 과거사를 줍다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전규찬 교수l승인2017.10.30 17: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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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아휴, 추워. 영하 2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벌써 겨울입니다. 해는 짧아지고, 아침인 데 캄캄합니다. 그래도 일찍 시장 한 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저녁에 끓일 버섯찌게에 들어갈 이곳 에스토니아 지역의 명물 쿠케센(kukeseen) 버섯을 사기 위해섭니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도 생산되는 걸로 아는 살구버섯이라는 건데, 여름철 쉽게 볼 수 있는 순수야생 버섯입니다. 색깔이 아주 노랗고 주름이 많은 게 우리가 흔히 하는 버섯 모양하고는 많이 다른데, 향이 아주 독특하고 진하며 맛있습니다.

이곳 현지인들은 그걸로 뭘 어떻게 해먹는지 잘 모르지만, 제법 맛들인 우리는 그걸 된장찌개에도 넣고 배춧국에도 넣습니다. 오늘처럼 버섯찌게에도 잔뜩 넣습니다. 그러면 어느 게 어느 건지 알아 볼 수 없이 맛이 다 똑같아져 버립니다. 상관없습니다. 이 먼 데서 이런 걸 해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깁니다.

하하, 오늘은 시장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신자유주의라면 딱 질색이던 삐딱이 탱자가 웬 시장 타령?’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해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시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건 모든 문제를 ‘시장의 자유’ 이데올로기로 풀어버리는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시장중심주의일 따름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거대시장에 단호히 적대하고, 재벌이 장악한 독과점시장을 아주 혐오합니다. 오직 그러한 점에서만 철저한 반시장주의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진정하고 참한 시장들은 그 가치가 무척 크며 또한 아름다운 장터들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는 게 바로 접니다. 서울에 있을 때 제가 오랫동안 즐겨 산책 나가던 곳도 다름 아닌 동묘라는 잡상인·고물·대중들로 들끓는 시장터이던 걸요? 연구실 생활이 지겨워질 때 무작정 나가보는 학교 근처 장위시장, 좀 걸어가야 이르는 청량리 시장은 또 어떻고요?

▲ 타르투 재래시장 겨울아침 풍경. ⓒ전규찬

모두 얼마나 재미나고 흥미로운, 신기인 공간인데요. 자주 봐도 안 지겹습니다. 흥미진진한 인생극장, 화려한 사물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지니까요. 영화보다 더 재미나고, 다큐멘터리보다 더 리얼합니다.

저는 시장에 널린 싸구려라 취급되는 잡화, 채소, 먹을 것들을 볼 때 마다 ‘휴, 아직 남아있네’ 하며 안심합니다. 속옷 고무줄, 쥐약 뭐 이런 후진 것들 파는 행상들을 마주칠 때마다는 속으로 꾸벅 감사를 표합니다. ‘수고하십니다.’ 이런 걸 사러, 보러, 혹은 그냥 들린 시장행인들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자꾸만 묘한 정을 느끼는 상대입니다. 마주친 적 없는 낯선 타인들인데도 말이죠.

그런 희한한 시장들이 아직 우리 주변에 남아있습니다. 대형 슈퍼나 아웃렛몰, 백화점과 같은 번쩍번쩍한 것들과는 한참 수준차가 나는 것들입니다. 그런 삭막하고 오만한, 호사스런 상품 물신의 일방 전시 공간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구질구질한 것들, 밀려날 것들이 오가는 장터들입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적정 가격대 상품들의 순환, 파는 이와 사는 이의 감정적 흥정과 합리적 타협, 매매관계를 벗어난 (혹은 넘어선) 사람들 사이의 인간적 유대와 교류, 세상물정 파악과 시세정보 교환의 사회적 동태. 제가 찾는 시장에서는 이런 다양한 쇼, 활동상들이 매일같이 다르게 연출됩니다. 예술가, 인류학자, 문화연구자가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이유죠.

잡인들의 이해, 빈난한 삶들의 파악, 빈곤현실사회의 연구가 이곳에서 가능합니다. 시장의 꼴을 예민하게 관찰하면 그곳 사람들의 생활양식, 문화조건을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표면을 통한 심층의 골상학적, 관상학적 이해. 전래의 시장에서 한 사회의 역사와 현실은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짚어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하하, 탱자의 말이 아닙니다. 벤야민, 마르크스 같은 제 뛰어난 선생들의 말씀입니다.

▲ 타르투 재래시장 겨울아침 풍경. ⓒ전규찬

타르투에 올 때, 탱자는 영어로 된 페르낭 브로델(F. Braudel)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만 딸랑 들고 왔습니다. 세 편으로 된, 두껍고 무거운 책자입니다. 15세기부터 18세기 초기 사이 자본주의 체제 구성의 역사를 유럽과 다른 물질문명들을 엮어가며 풀어갑니다. 내용이 방대하고 만만찮지만, 유럽 변두리 방문자로서 작심하고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시장을 보는 시선이 저랑 똑같습니다. 브로델에게 시장은 상품, 자본(주의)의 문제인 동시에 교통, 교역, 커뮤니케이션의 처소입니다. 상품교환 장소이자 인간교류 공간, 그렇게 역사 속의 시장을 정의합니다.

맞습니다. 지역 사정과 세계 동향이 도심 장터에 비칩니다. 물건 교환·교류의 관계를 통해 반사됩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심상조차 그곳에서는 눈빛과 동작, 접촉에서 살짝 드러납니다. 반짝, 현실이 현상하는 순간입니다.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타지에서도 마찬가지죠. 소중한 방법론적 공간과 긴밀히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탱자가 오늘 추운 아침에 이곳 재래시장을 다시 찾은 이유입니다. 물론, 대다수 타르투 사람들처럼, 탱자 또한 대부분 식자재를 슈퍼에서 편의적으로 구합니다.

이곳도 여타 도시들처럼 체인형 대형슈퍼들 천지입니다. 거기가면 에스토니아가 유럽에 속함을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없는 게 없습니다. 잘 포장된 상품 천지입니다. 가 봐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잘 눈에 띄지 않은 후미진 곳에, 낡은 전통시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곳 말로 투르그(Turg)라 합니다. 이 귀중한 데를 탱자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가서 포착해 내야 합니다. 서구화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의 정체와 욕망, 그 이면의 모습, 또 다른 얼굴을 만나봐야 합니다. 장소가 바뀌면 시간이 차이 납니다. 사람도 바뀝니다.

▲ 타르투 재래시장 겨울아침 풍경. ⓒ전규찬

각양각색의 옷들이 내걸려 있습니다. 싸구려 같습니다. 값싼 채소와 과일들이, 잡화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 걸 파는 점포들이 번호판 하나씩 달고 쭉 줄서 있습니다.

기분이 묘합니다.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랄까요? EU에 가입해 유로만 통하는, 서유럽을 갈망하며 영어를 많이 쓰는, 발틱(Baltic)이 아닌 노르딕(Nordic)과 동일시하려는 에스토니아입니다. 그 나라의 세련된 문화수도를 자부하는 타르투의 한 모퉁이 시장에서 과거 삶의 흔적과 현 생활의 자취를 진하게 접합니다.

한국의 시골장터 같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덮어 쓴, 우중충한 차림과 거친 피부의 상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내놓은, 실내대형슈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품질과 종류, 가격의 상품들이 초겨울 아침 추위에 파랗게 얼어가는 듯합니다. 그걸 사려고, 아님 그냥 구경하려 나선 꼬질꼬질한 차림의 늙은이들에게서도 탱자는 더욱 추위를 느낍니다.

그들의 창백한 표정과 왜소한 어깨에서 ‘동유럽’ 잔여집단의 초라한 행색을 파악합니다. 탱자의 눈에, 이 시장은 독립 이후, EU통합 이후 지워져 가는, 아니 아직까진 지워질 수 없는 과거사, 구체제의 쓸쓸한 행적을 표현하는 공간 같습니다.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그때의 인민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요? 그 낡고 늙고 빈난한 자들에게 이 시장은 최후의 공익, 서로살림의 드문 터가 되고 있진 않을까요? 아, 그 소중한 시장이 과연 닥쳐오는 서구식 상품 체인, 물신숭배의 백화점, 자본 재개발의 위세를 버텨낼 순 있을까요? 아님, 어떻게 사라지고 말까요?

그러고 보니, 제가 막 도착해 찾았던 여름날과는 이미 많이 달라진 듯합니다. 휑하니 많이 비었습니다. 닫히고 있는 걸까요? 제발 겨울이라 잠시 그런 거면 좋겠는데. 탱자는 오늘 아침 결국 원하던 노란 버섯은 사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습니다.

▲ 타르투 재래시장 겨울아침 풍경. ⓒ전규찬

전규찬 교수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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