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32 ] 최 산파 님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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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전북원음방송 PD] 휴일에 남편의 직장 선배가 빙모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이 문상을 가야겠다고 채비를 했다. 나도 잘 아는 K 과장은, 남원 출신으로 내 후배 C의 남편이자 나의 중학교 동창 J의 제낭(弟郞)이다.

J와 C는 자매인데 J는 중학교 졸업 이후 거의 소식이 끊긴 상태이고, 의료 보건직에 있는 C는 가끔 보건소에서 만난 사이이니 오히려 동창보다 후배와 더 가깝다. 게다가 후배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가끔 친정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었기에 심정적으로는 이웃사촌 못지않다.

남편의 직장선배 빙모상은 곧, 내 친구와 후배의 모친상이어서 남편의 문상 길에 동행했다. 더구나 J의 모친은 나를 세상으로 꺼내 주신 산파(産婆)이셨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65년 전라북도 남원에는 읍내에 <유린 병원>이 유일했고 산부인과는 아예 없던 시절이어서 대부분의 출산과정을 산파에 의지하고 있었다. J의 어머님은 ‘최 산파’로 그중 한 분이셨다. 

남원시 하정동 70번지, 삼표연탄 골목 끝집 마당 한편에 은방울꽃이 은은한 향을 풍기며 기지개를 켜고 동쪽에서 은근한 일출이 시작될 새벽 무렵, 큰 딸이 산기(産氣)가 있자 다급해진 외할머니는 따뜻한 아랫목에 산모를 눕히고 심호흡을 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부엌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겠지. 산파를 부르는 일은 아마도 당시 일곱 살이었던 막내 이모가 심부름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 나오겄다! 막내야~ 후딱 가서 최 산파님 모셔와라. 후딱 갔다와라 잉~” 할머니 목소리가 다급했을 것이다. 문밖에서 조카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던 막내 이모는 긴 골목길을 뛰다가 고무신이 벗겨져 고무신을 들고 뛰었을 것이다. 그 시절, 애 낳은 일은 일각을 다투는 일이었을 테니…….

다행히 최 산파 댁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거리여서 ‘내가’ 엄마 자궁에서 들락거리다가 숨이 막혀서 세상을 보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일등공신은 막내 이모의 발 빠른 심부름 덕분이었다.

 막내 이모 손을 잡고 달려오신 최 산파 아줌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한 일가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차분하고 노련하게 진두지휘하셨을 것이다. 산통으로 힘들어 산모를 조련하고 아직 세상을 모르는 태중의 아이를 어르면서, 아이를 점지한 삼신할머니와, 만 생령을 다스리는 조물주와, 생명의 신과, 세상의 모든 에너지의 기운을 받아 마침내, 건강한 한 생명을 집안의 문중과 세상에 바쳤을 것이다.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힘찬 울음으로 세상과 조우하도록 하셨을 것이고, 엉덩이를 맞아서 깜짝 놀랐지만 내 울음 덕분에 모든 사람이 안도하고 기뻤을 것이다.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 젖히는 소~리
내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던 바로 그 날이란다
두리둥실 귀여운 아기 하얀 그 얼굴이
내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던 바로 그 모습이란다
하늘은 맑았단다 구름 한 점 없더란다
나의 첫울음 소~리는 너무 너무 컸더란다
하하하
꿈속에 용이 보이고 하늘은 맑더니만
내가 세상에 태어났단다 바로 오늘이란다
(가람과 뫼 노래 <생일> 가사 중)

어머니의 직장 생활 때문에 유년 시절 많은 시간을 외갓집에서 지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유일한 조카로서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외삼촌이나 이모들에게 어쩌면 조카 이상의 형제애 같은 연대감을 형성하며 외갓집의 ‘식구’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철도공무원이셨던 어머니가 밤 근무를 서는 날이면 셋째 이모가 업고 막내 이모가 모기에 물리지 말라고 부채질을 하며 외갓집에서 엄마 근무처까지 젖을 먹이러 다녔다고 했다. 어느 날은 삼촌이 당번을 맡기도 했다.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집안의 말하는 장난감이었고, 심부름도 곧잘 해내서 동네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일곱 살 때 천안에 살던 셋째 이모가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왔다. 7년 전, 엄마가 누웠던 아랫목에 같은 자세로 이모가 눕고 할머니는 또다시 바빠지셨다. 여중생이 된 막내 이모가 부엌을 드나들며 물을 끓이고 외할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애기 나오겄다! 아가~ 얼릉 가서 최 산파 모셔 오너라. 후딱 댕겨 와야한다잉~” 

지금 생각하니, 외할머니는 굳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유일한 손녀였던 그때부터, 할머니에게는 손자 손녀이자 내게는 사촌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났을 때에도, 그냥 ‘아가’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름 대신 아가라고 부르셨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도 아가였다. 아, 나는 외할머니의 유일한 아가였던 것이다.

달빛처럼 고요한 그대는 누구인가
햇살처럼 화사한 그대는 누구인가
그 누구의 사랑으로 여기에~~ 서 있는가
영롱한 그대 눈빛은 내 모든 눈에 빛을 던지고
조그만 그대 입술은 외로운 마음에 위로를 주네
그대와 나의 만남은 보배로운 약속
내일은 그대의 것 내일은 소망의 날 
나의 사랑아~~
달빛처럼 고요한 그대는 누구인가
햇살처럼 화사한 그대는 누구인가
그 누구의 사랑으로 여기에~~ 서 있는가
(송골매 노래 <아가에게> 가사 중)

외할머니의 큰 손녀로서 서열 1위였던 나는, 2호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며 긴 골목길을 달려서 최 산파 댁으로 향했다. 신작로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호남 목욕탕 못미처 최 산파 댁이 있었는데 목욕탕 가는 길에 숱하게 봐온 길목이어서 잊을 리가 없다. 숨소리만 듣고도 내용을 간파한 최 산파는 내 손을 잡고 이모의 출산을 도우러 연탄집으로 오셨다. 7년 만의 방문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사촌동생 건석이는 유일한 손자로 나의 대를 이어(?) 집안의 사랑을 받았는데 건석이의 득세는 2년에 미치지 못했다. 곧이어 건석이  동생 명구가 태어났고, 줄줄이 이모와 삼촌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외갓집은 몇 년 사이 올망졸망 아이들 천국이 되었다.

이모와 삼촌들은 각기 제 살길이 바빠서 더 이상 조카를 보살피지 못했으니, ‘이모 하나는 업고 삼촌 하나는 부채질하며 젖 먹이러 다녔다’는 전설은 나 하나로 족하게 되었다. 건석이가 태어난 이후로, 남원에도 산부인과가 생겨서 더 이상 산파를 부르러 다니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특이한 것은 큰삼촌과 이모들이 외갓집 가까이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촌들과 매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아래로 건석, 명구, 형준, 경미, 진원, 동원 등(물론, 각자 성은 다르다) 줄줄이 태어나고 자라나서 사촌동생들의 유년기와 나의 청소년기를 같이 보낼 수 있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사촌들이 모이면 웬만한 부대 부럽지 않았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혹은 다 같이, 연탄공장 골목에 모여서 노느라고 정말 바빴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뜨며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그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대며 서로 웃었지
어색한 표정에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 날 보물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자전거탄 풍경 <보물> 가사 중)
 
내가 나이를 먹었듯이, 사촌동생들도 각자 가정을 일구어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보시기에도 흡족하실 것이다. 

고인이 되신 최00 님은 85세로 운명하셨다. 내 나이를 대고 계산해보았더니 최 산파님은 32세에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도와주셨다. 의료기술이 변변찮은 시절에, 수많은 생명을 세상과 만나게 해주신 고인의 은덕은 저 세상에서 큰 상(償)으로 화답해주시리라.

조문을 마치고 최 산파님의 둘째 딸 J를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을 전공했을까 생각했는데 과학교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상중(喪中)이라서 긴 말은 나누지 못했지만, 잠시라도 위로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에 좋은 날 다시 만나서, 그대의 어머님 덕분에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어머니를 대신해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하고 싶다. 최 산파 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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