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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내 기억에 어린 시절 겨울은 엄마의 뜨개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김장이나 연탄 들여놓기 같은 겨우살이 준비는 어른 들 몫이니 정해진 날 사나흘에 걸쳐 잔심부름이나 하면 아이들로서는 일 년 책임은 면한 듯싶은데, 어른들의 겨울 준비는 시작은 이르고 끝은 없었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신작로 앞 양품점에서 색색의 실을 사놓고 가족들 겨울옷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자 몫으로는 주로 조끼를 떴고, 여자용으로 목도리에서부터 모자, 장갑 등 다양한 소품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충 치수를 가늠하고 촘촘히 떠가다 보면 날이 갈수록 당사자가 불려 가는 횟수가 늘었다. 가슴을 대보고, 목을 대보고, 작으면 풀어서 다시 만들었다. 옷이 커도 여지없이 풀리기 일쑤였다. 자주 불려 갈수록 옷은 안성맞춤이었고 응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한두 군데 여운이 남아서 완벽을 추구하는 엄마의 아쉬움을 샀다.

첫 작품의 수혜자는 그 해의 문열이로서 일찍 배당받은 대신 생산자의 만족감은 적었다. 이후 엄마의 뜨개질은 속도가 붙어서 그야말로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번 탄력이 붙은 엄마의 뜨개질바늘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자기가 박힐 곳을 찾아서 콕콕 찍은 다음 정해진 공식을 따라 현란한 무늬를 양산하며 작품으로서 가치를 더했다.

양품점에서 실과 함께 간단한 신기술을 전수받은 엄마는 특유의 끈기와 창의력을 더해 독특한 작품을 생산해내기에 이르렀는데 심지어 원산지인 양품점에서 엄마 작품을 사고 싶어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의 목적은 단 하나, 더 추워지기 전에 예쁘게 입히고 싶었던 마음뿐인지라, 양품점 주인의 유혹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당시 혜은이가 혜성같이 등장했고, 엄마는 라디오를 틀어놓거나 혹은 혼자서 혜은이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대바늘을 놀렸다.

▲ 혜은이 앨범 자켓사진.

당신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꺼야

마음이 서글플 때나 초라해 보일때에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두 눈에 넘쳐 흐르는 뜨거운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 드릴께

당신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모했는지

뒤돌아 봐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혜은이 노래 <당신은 모르실거야> 가사)

마침내 손 등에 오롯이 내 것임을 입증할 문장 같은 표식까지 수놓아지고 왼손 장갑에서 오른손 장갑으로 기다란 줄이 연결되면 비로소 털장갑이 마무리되었다. 털장갑을 끼고 학교에 가던 날, 언제쯤 눈이 올까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었다. 털장갑이 눈싸움에 동원되고 나면 축축하게 젖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장갑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했다.

애초 엄마의 목표는 털장갑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가볍게 몸을 푼 뒤로 빠른 속도로 망토를 뜨기 시작했다. 마름모꼴의 앞판과 뒤판을 뜨고 목을 내고 칼라를 달아서 이어 붙이니 또다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망토가 완성되었다.(순서가 바뀔 수도 있겠으나 최종 완성품의 모양은 그러했다.)

그즈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앞세워 빨간 부츠가 배달되고 부츠와 망토는 한 세트처럼 안성맞춤이어서 가는 곳마다 인기를 누렸다. 읍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패션이었던 셈이다.

엄마의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망토 안에 입힐 스웨터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꼬리’라고 불렸던 목이 달린 스웨터는 철저하게 바람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목에서 꼬아 내려오는 부분이 너무 답답했다. 스웨터를 입고 전주라도 갔다 오는 날이면 멀미도 잦았다. 어쩔 수 없이 스웨터는 방치되었는데 나중에 사촌동생이 가져가 잘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웨터까지 뜨고 나자 색실이 조금씩 남았다. 자투리 실을 이용해서 엄마는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색 배합을 잘 해서 또다시 멋진 목도리가 탄생했다. 목도리는 종류별로 다양하게 떠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할머니, 이모, 숙모, 상가 아주머니들까지…….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의 개성과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맞추었는지 받는 사람마다 탄성이 쏟아졌다.

엄마의 털실은 겨우내 유용하게 쓰였다. 빨간 내복이 작아져서 팔목이 삐져나오면, 손목에서부터 빨간색 실로 뜨개질을 해서 덧이었다. 탄력이 적어서 입고 벗을 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속옷 대용으로 그만한 게 없었다. 특히 털이 풍성한 빨간 양말은 내가 무척이나 아끼던 것이었는데 옛날 양말은 왜 그리도 빨리 ‘빵꾸’가 나는지, 헤지는가 싶으면 금방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병태 발가락이

양말을 뚫고 쏘옥 나왔네

병태 엄지발가락이

양말을 뚫고 쏘옥 나왔네

어, 추워

어, 추워

꼼지락꼼지락 양말 속을 찾지만

들어갈 곳이 없네

병태 발가락

어, 추워

어, 추워

병태 양말 빵꾸났네

(김용택 시, 백창우 곡, 굴렁쇠아이들 노래 <병태양말>)

양말에 ‘빵꾸’가 나면 일차 실로 꿰맸고 뒤꿈치 부분은 정교하게 뜨개질로 이어 몇 년은 거뜬히 신고 다녔다. 1970년대 물자가 귀했던 시절, 양말도 개인이 차지하기는 쉽지 않았던 터, 실내화 신는 것이 금지된 학교에서는 등교해서 교실 바닥을 맨발로 활보했던 아이들도 있었기에 양말 한 켤레도 귀했다.

뒤꿈치 부분을 털실로 메우고 발가락 부분도 털실로 이어서 짠 내 양말은 곧 학교에서 화제가 되었고 어느 날은 교무실로 불려가서 선생님들 사이에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엄마가 재활용한 양말은 곧 절약정신의 표본이었는데, 솜씨가 정교해서 양말이 아니라 예술품 같았다. 그렇게 헤진 양말을 기워서 신고 다닌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중학교에서는 가사 시간에 바느질과 뜨개질 시간이 있었다. 엄마는 솜씨가 좋았지만 나한테는 “여자가 바느질 솜씨 좋으면 팔자 사납다”고 하시면서 극구 바느질 하는 걸 말리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사시간에 앞치마에 프랑스 자수를 놓아서 청소시간에 착용하도록 했다.

에이프런은 어찌어찌 완성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난도가 높은 과제물이 쏟아졌다. 2학년에는 스킬 자수로 방석을 만들었고, 3학년 때는 여름용 이불을 제작하기도 했다. 엄마의 뜨개질 솜씨는 은근히 소문이 나서 중학교 가사 선생님도 엄마한테 자문을 구하러 집에 다녀가기도 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솜씨가 부족했다.

엄마를 닮아 솜씨 좋은 막내 이모가 떠준 가로 10cm의 발바닥에서 내 목에 닿을 만한 길이의 진한 아이보리 색 목도리를 여고 3년 내내 하고 다녔다. 당시에는 목도리가 긴 것일수록 명품(?)으로 쳐주었는데, 목을 두 번 감아서 아래 것을 감거나 처음부터 두 겹으로 접어서 사선으로 단정하게 매는 것이 교복과 썩 잘 어울렸다.

바람이 불거나 아주 추운 날에는 귀를 중심으로 한번 감고 목을 두어 번 감았다. 목도리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대칭형의 여고생의 얼굴로부터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액세서리였다. 목도리가 없는 아이들도 많았으니 딱 한 개도 풍족했던 것이다.

교육의 효과는 긍정적이다. 솜씨 좋은 여학생들은 뜨개질을 배운 이후로 목도리 정도는 척척 만들어서 두르고 다니거나 선물하기도 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목도리를 떠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남자친구도 없었고 뜨개질 솜씨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목에 목도리 하나씩 두르고 다니는 남학생들 가운데 대다수는 “나는요, 이런 거 떠주는 여자 친구가 있답니다”를 인정하고 자랑하는 셈이었다. 혹은 맘에 담아둔 사람을 위해 촘촘히 사랑을 짜서 그 아이가 오는 길목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훌쩍 목도리만 전해주고 도망치듯 돌아선 여자아이도 있었다.

목도리를 받은 남자아이가 여자한테 감사를 전했는지, 아니면 그 목도리를 같은 반 친구에게 주었는지, 그 뒷소식은 듣지 못했다.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에 촌스러워도 그때는 그것이 유행이고 절대적인 약속이었다. 남원역 앞, 복지다방에서 동북교회로 이어지는 골목길, 가로등도 위태롭던 그 겨울의 한복판에서 목도리는 그렇게 겨울의 추억이 되었다.

▲ 유심초 1집 앨범 사진.

하얀 불빛 아래에 침묵만이 흐르고

낯설은 네 눈길에 눈물만이 흐르네

멀어져 간 발길이 다시 올것만 같애

기다리는 마음은 슬픔으로 변했네

나는 홀로 있어도 나는 네가 없어도

마지막 네 손길은 변치않는 영원이라고

나는 생각 하면서 간직하리 너의 모습을

(유심초 노래 <나는 홀로 있어도>)

 

대학생이 되었을 때, 뜨개질 목도리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폴리와 모 혼방 등 싸고 멋진 머플러가 멋쟁이들의 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사시간 숙제로 뜨개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 후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친정어머니께서는 몇 번 목도리를 만들어 주셨는데 아이들은 털실이 따갑다고 싫어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뜨개질을 멈추셨다. 뜨개질을 해서 입힐 대상이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나는 여직 뜨개질을 못한다. 바느질도 솜씨가 형편없다. 반면 친정엄마는 아직도 느리지만 차분하게 실을 끌어다 정교하게 뜨개질을 이어나가고 단추도 꿰매어주신다. 단추 정도야 달 수 있지만, 일부러 험한 옷을 두어 엄마에게 손 봐 달라고 응석을 부리곤 한다.

그럴 때면 팔순이 가까운 노인네는 싫은 기색 없이 바느질거리를 받아 드신다. 예전에는 “얘야, 얘야” 하면서 나에게 바늘귀에 실을 꿰어달라고 했지만, 요즘은 딸 대신 손자들에게 부탁하는 걸 즐기시는 것 같다. 이러한 정경이 오래 계속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뜨개질 한 건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는 뜨개질을 빌미로 목도리 선물 한번 하지 못했다. 혹시 없는 솜씨라도 발휘하여 밤새워 뜨개질을 하여 누군가 맘에 드는 사람의 목에 따스하게 목도리라도 감싸줬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사람은 오늘처럼 찬바람이 부는 겨울의 길목에서, 첫눈 오는 날 그렁그렁한 속 깊은 하늘을 보며, 혹은 겨울비 짠하게 내리는 날, 한 번쯤 자기 목을 감싸 안으며 목도리의 추억을 더듬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깝고 소중한 추억의 재산 하나 늘리지 못한 게 은근 아쉽다.

별빛에 맑게 빛나는 내 슬픈 얼굴아

기러기 울며 날아간 하늘을 보나

그리움 눈처럼 쌓여 언덕을 굴러넘고 파란 달빛 나린다

내 텅빈 뜨락에 바람은 나뭇잎을 휘몰고 사라졌는데

왜 아픈 그리움의 조각배는 내 가슴에 떠 있는가

지울수 없나 없나 겨울이면 떠오는 영상

파랗게 시린 내 사랑 얼어버린 슬픈 뒷모습
(이선희 노래 <겨울 애상> 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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