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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이 사라진 무서운 세상

[무소음 세상①] 월곶역, 말없이 사라진 열차 안병진 경인방송 PDl승인2018.01.09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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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유지방'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그는 내내 나와 함께 녹음 작업을 진행해온 사운드맨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와 직업이 같지만, 지방소유량이 월등해 나는 그를 '유지방'으로 부른다. 녹음 작업을 할 때, 서로 말을 할 수 없어 우리는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다.

'왜요?'

'뭔가 이상한데요.'

'뭐지? 조금 더 녹음하고 이따 얘기합시다.'

눈빛으로 대화를 마치고 멀찌감치 물러나 그를 바라본다. 월곶역. 수인선 열차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새로 개통한 전철 플랫폼에 그가 서 있다. 양손에 마이크를 들고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람을 막기 위해 마이크에 씌운 윈드재머가 통통한 고양이 같다. 잠든 고양이 두 마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왠지 우습다. 열차가 출발한다. 유지방은 뒤돌아 다시 나를 쳐다본다. 그때야 그 눈빛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 월곶역에서 녹음을 하고 있는 모습. ⓒ안병진 PD

열차는 조용히 플랫폼으로 들어와 말없이 사라졌다. 마치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유지방은 텅 빈 플랫폼에 서있다. 소리 나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뛰놀던 유지방의 두 고양이들도 쥐죽은 듯 고요하다. 세상이 무소음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아직도 모르시나요? 혁신적인 무소음 전동 글라인더',

'더 이상 이웃의 눈치 보지마세요. 한밤중에도 청소 오케이!'

'3차원 입체 어드벤스 무소음...'

세상은 이미 무소음의 세계에 진입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 광고가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이미 텁텁하고 숨막히는 용각산 분말 같은 무소음 도시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의 삶을 생각해보라. 타인의 소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물의 소리를 제거한다. 동물의 소리도 제거한다. 함께 쓰는 공간은 무소음 진공상태로 만들어 서로를 고립시킨다.

소음은 살인의 동기가 된다. 어색한 공기를 깨기 위해 싸구려 향수와 감흥없는 음악으로 엘리베이터 같은 곳을 채워넣는 것이 이 도시의 현대적 삶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없앤 그 소리를 저급한 음질로 재연하는 세계.

이웃과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AI 음성기계와 이야기하는 세계. 외로움도 뮤트하는 개인의 세계. 새로운 라디오 콘텐츠를 만들러 소리를 녹음하러 다니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진공의 적막한 소리를 듣게 됐다.

라디오는 소리의 매체다. 누구나 아는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나는 15년이 걸렸다. 그 사이 라디오를 듣던 시대, 풍성했던 소리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무소음 세계의 라디오는 불행일까, 다행일까. 소리가 사라지는 무서운 세계.

역설적이게도 ‘사운드 콘텐츠가 앞으로 라디오의 동력이자 가능성’ 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이 연재의 시작이 됐다. 30년 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이룩한 소리 채집과 기록의 방식이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소리로 기록하고 기억하며 또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이 라디오PD로서 나의 바람이고, 이 연재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다.

1984년에 제작했지만 1987년이 되어서야 들을 수 있었던 노래.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변함없이 들리는 소리 이제는 다가버린 소리

들리던 소리도 들리지 않네 그 어디서 울리고 있을까 

(중략)

채석장의 돌깨는 소리, 공사장의 불도저 소리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중략)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

여전히 이 도시의 어딘가는 무너지고,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예전에 듣던 소리는 사라지고 새로운 소리가 그걸 대체한다.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면서 세계는 무소음의 진공 상태로 서서히 이동해가고 있다.

무소음 세계, 무서운 세계에서 소리 매체 라디오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들려줄 것이다. Radio is A Virus!

 


안병진 경인방송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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