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를 떠도는 '관행'이라는 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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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기' 사고‧ '상품권 페이'로 상처받은 '병'들의 현실

[PD저널= 전규찬 언론연대 공동대표(한예종 방송영상과 교수)] 외부는 모르는 내부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갑(甲)의 방송사가 을(乙)의 외주 제작사와 병 지위인 그 스태프들에게 현금 아닌 상품권을 지급해 온 건, 특정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해당 방송사 아울러 방송사 전체의 관행 즉 업계에서 통용되어온 습속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논란이 된 ‘상품권 페이’에 대해 SBS <동상이몽> 담당PD가 제보자 스태프와 통화하며 밝힌 내용이다. ‘내부 관행’이라는 말이 몇 차례나 반복된다. 무섭다. ‘관행’이라는 병은 촛불이 밝힌 이 변화·쇄신의 시기에도 아직 이렇게 방송업계 내부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많은 이가 적폐라 할 기이한 관습이 방송현장에서는 버젓이 ‘관행’으로 통하고 있다. 관행(慣行). 대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관행은 사실 특권적 소수에게만 통한다. 부정한 현실을 ‘관행’으로 덮고 비리의 현장을 ‘관행’으로 무마하는 건 강자의 주특기.

한 마디로 문제되는 ‘관행’은 강자독점의 다른 말이다. 특히 힘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한 관행의 경우, 그것은 틀림없이 전자의 불리를 전제로 한 권력 지배의 수단 혹은 부당권력행사의 방식이 될 것이다. 촛불혁명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적폐가 된다.

비정규 방송노동자의 소비생활을 크게 제한하는, 거부할 도리가 없는 일방적 상품권 지급의 관행이 딱 그러하다. 열심히 돈 모아 최소한의 미래는 준비해야 할 텐데, 당장 지출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백화점 상품권을 받아들고 그의 식구들은 어찌해야 하겠나.

구두 수선방 등지를 헤매며 일정한 수수료를 내고 현금으로 교환하면 될 일인가. 방송사의 '갑''을'은 외부 기업 협찬으로 제작비·인건비를 줄이는 편의를 보고, '병'의 외부 스태프는 임금을 협찬 상품권으로 지불받아 불편을 보는 비대칭 ‘관행’은 말도 안 되는 적폐일 뿐이다.

‘관행’이라는 강자의 언어와 의식, ‘관행’에 기댄 기득권의 행사는 방송제작 현장에서 보편적이다. 그러면서 층층 착취의 관계, 위험한 구조, 피해의 시스템을 초래한다. 소도구팀 스태프가 작업하다 떨어져 크게 다친 <화유기> 사건. '갑'의 방송사(tvN), 원청인 JS픽쳐스 그리고 하청업체 '을'일 MBC아트가 공히 눈감은 불안전노동 ‘관행’의 전형적 사례다.

고통은 '갑''을'도 아닌 '병'에게만 전가되고, 제작사·방송사·하청업체 3자는 “관행상 전식(전기시공) 업무에 대한 명확한 담당을 두지 않고 촬영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만 하소연할 뿐이다.

부당한 노동을 유발하고 치유 안 될 골병을 낳는, 말 그대로 폭력적인 관행. ‘관행’은 질기다. 무섭도록 오래간다. 내가 속한 집단의 관행, 우리의 관행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져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 지상파 3사 사옥 이미지. ⓒPD저널

방송사의 우월적 위치에 편승해 기득권을 행사하는 방송사 직원 '을'의 외부 약자 '병'들을 대상으로 한 언어·신체·정신적 폭력행사가 반복되는 까닭이다. 2015년 MBN 직원이 독립PD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물리적으로 구타해 큰 논란이 일었다. 예외적인 일이었던가. 관행의 시정, 극복이 있었던가.

시차를 두고 예외가 반복되면, 그건 ‘관행’으로 여기는 게 맞다. 김장겸 체제의 MBC에서는 작년 <리얼스토리 눈> 사건이 터졌다. 외주제작 PD들이 당시 CP의 관행화된 언어폭력에 매일같이 시달렸다.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욕설과 멸시, 모욕을 일상적으로 감수해야 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까다로운 갑을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병들은 고인의 빈소를, 교정시설을 몰래 촬영해야 했고, 바로 그 비윤리적 ‘관행’ 때문에 결국은 독립PD들이 검찰에 기소까지 됐다. 

당연히 갑을은 공모해 책임을 회피할 것이며, 모든 걸 병의 탓으로 돌린다. 협박에 가까운 언어로써 문제를 덮고 상황을 봉합하려 한다. 물론, 이 또한 강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전형적 위기관리, 사태 처리의 관행이다.

오죽했으면 MBCPD협회가 “더러운 적폐의 민낯”이라는 자평을 내놓았을까. 시간이 지나 MBC 적폐체제는 마침내 해체됐다. 최승호 사장을 대표로 한 청산체제가 새롭게 들어섰다. 그랬으니 공고한 갑을 적폐의 관행, 힘없는 병들을 상대로 한 관행화된 적폐 또한 곧 사라질 건가.

지배자 갑을과 피지배자 병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행은 중층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 지배적이고 제도화된 관행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갑을 기득권, 지배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독립PD의 경우를 한번 보자. 불평등 계약의 관행, 일방적 저작권 소유의 관행, 낮은 제작비 책정의 관행, 협찬과 간접광고 강요의 관행, 프로그램 내용 간섭 및 심의의 관행 등 온갖 관행들이 횡횡한다. 물론 방송사 갑의 이익, 이윤을 위해서다.

그리고 방송사에 속한 을들도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병들에 대한 탈취 구조, 병들을 수단으로 삼은 수탈체계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다. 병들을 외부로 한, 갑을 내부의 견고한 담합구조. ‘노동자’라는 말조차 쉽게 못 넘어서는 단절의 벽.

그런 상황에서 작년 박환성·김광일 독립PD가 아프리카에서 사고로 죽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독립PD들과 시민사회는 외주제작 ‘관행’이라는 괴물이 초래한 병들의 사망사건으로 규정했다. 그 후 꽤 긴 타협의 시간이 흘렀지만, 논란은 여전히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EBS가 최근 몇몇 개선책을 내놓았지만, 제도화된 관행이 해소될지도 아직 미지수다. 정확한 진상조사에 기초한 내부 책임자 징계‧처벌의 선결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장 유감 표명 정도로 사태를 끝내고자 한다면, 병들은 과연 동의할까.

냉정히 말해 EBS의 제도개선조차 아직까지 그러겠다는 약속에 머문다. 그런데 방송사 전반적으로 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독립PD를 포함해 외부 스태프와 비정규직 그리고 프리랜서 작가 등 병들을 상대로 한 방송사 ‘갑을질’ 개선의 실질적 노력은 SBS와 같은 민영방송은 물론이고 KBS나 MBC 등 공영방송에서 찾아볼 수 없다. 최승호 사장도 아직 어떤 말을 내놓은 게 없는데, 해임 절차를 밟고 있는 고대영 사장 다음으로 뽑히게 될 새 KBS 사장은 과연 의미 있는 의지를 당차게 밝힐 것인가.

정권이 바뀌고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부처가 나섰다. 작년 말 ‘방송 프로그램 외주 제작 불공정 관행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그 후속조치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발표하기도 했다. “더 좋은 방송영상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상생 환경이 만들어 질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과연 현실은 이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인가, 아님, 오래된 미래의 불변적 관행으로 병들의 희망을 계속해서 배신할 것인가. 국가는 ‘방송 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정한 방송 산업 생태계 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번에는 정말 잡을 수 있을까.

방송사와 정부가 이런저런 대응책들을 관행적으로 내놓는 바로 그 때, 제작 현장의 병들은 선물권이라는 유사 화폐를 관행처럼 수령해야 한다. 이게 현실이다.

그 외에 또 어떤 엽기적 착취, 기이한 폭력들이 병들의 ‘방송계갑질 119 오픈채팅방’에서 폭로되고 있을까. 고발이 이어지면 부당노동에 시달리고 상처입은 '병'들에게 과연 봄이 올까.

병들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미래를 위해, 병들을 억압하는 관행의 적폐, 적폐의 관행 청산을 위해.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함께 할 건가. 할 수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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