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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못하더라도, 더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인터뷰] 드라마 현장 실태 고발한 배우 허정도 "정부 대책, 아쉽지만 기회" 이미나·김혜인 기자l승인2018.01.12 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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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허정도 씨 ⓒ노블레스

[PD저널=이미나·김혜인 기자] "한 마디로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대형사고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 그게 바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실태인 것입니다. (...) 이제는 제발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한 편의 (☜원문 보기)이 주목을 받았다. 앞만 보며 쉼 없이 달려오다 몸과 마음의 소진을 경험하고 훌쩍 먼 여행을 떠났다는 자기고백에서 시작한 글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일상적으로 행한 폭력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졌다.

글은 이 같은 현상이 개인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하루 20시간 이상 쉼 없이 일하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작업방식, 안전사고와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장 등 열악한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만드는 이들도 행복한 '우리 모두의 드라마'가 되길 꿈꾸며" 정부에 구조적 개선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는 것으로, 글은 끝을 맺었다. 

이 글의 주인공은 12년차 배우 허정도 씨다. 연극과 독립영화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2014년 JTBC <밀회>를 시작으로 SBS <풍문으로 들었소> <미세스 캅>, tvN <기억>, MBC <W>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등을 거치며 눈도장을 받았다. 글을 올린 뒤 "TV에 처음 나왔을 때만큼 연락이 왔다." 대부분은 현장에서 함께 손발을 맞췄던 이들이었다. 일부는 말 못할 사정을 대변해 준 그에 대한 고마움을, 또 일부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말을 전했다.

과거 드라마 현장에 몸담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떠난 사람들의 비밀 댓글도 연이어 달렸다. '아직도 그러네요'가 대부분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가 지적한 현실이 꽤 오랜 시간 관행으로 이어져 왔다는 증언들이다. 11일 <PD저널>과 만난 허정도 씨는 "더 이상은 침묵할 핑계가 없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을 뿐"이라며 "많은 분들이 글을 공유해 주고 고마워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글에서 밝힌 것 외에 노동 시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비를 세팅하고 세트나 소품을 준비하는 시간, 즉 '시청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노동임에도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단역 배우의 경우 사전에 협의된 스케줄에 따라 촬영장에 갔어도, 현장에서 자신이 출연하는 장면이 '날아가면'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허정도 씨는 "(단역 배우는) 지방으로 촬영가서 교통비, 여관비까지 내면 (지급되는 임금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며 "1회차 촬영까지는 몰라도, 2회차가 넘어가면 수입이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부 대책, 아쉽지만...이번이 기회라고 생각"

▲ 드라마 촬영 현장 모습(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MBC

"전혀 놀랍지 않았어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한 것이 현장이거든요. 알려지지 않은 일들도 더 많을 겁니다. 찾아보니 예전에는 누군가가 현장에서 사망한 경우에만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이번 사건은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알려진 것 아닐까요."

tvN <화유기> 촬영장에서 스태프가 추락 사고로 부상을 입은 사건을 두고, 허정도 씨는 이렇게 평했다. 정부에 공개적으로 제안을 하게 된 배경에도 이 '달라진 분위기'가 자리했다.

그는 정부가 마련한 외주제작 개선 종합대책에 대해서도 "실태 조사에 배우와 스태프가 빠져 있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또 "홍보나 교육면에서의 대책을 내놓았는데 이건 현실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정부 지원 드라마에는 표준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했지만, 이 또한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했다. 단막극을 제외하고 정부 지원을 받는 드라마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표준계약서 자체도 '을'의 입장이 완전히 반영되지는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면서도 허정도 씨는 "부족할지언정 마음은 함께 가고 있다고 느꼈다"며 "'이번 정부가 아니면 언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지금이 (구조적 개선의)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의 노동시간 단축이 급선무라는 것이 허정도 씨의 생각이다. 근로기준법 제59조에 따른 노동시간 특례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뜻을 같이 했다. 그는 "노동시간에 제한이 없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라며 "최저임금 인상안처럼 노동시간 제한 목표를 설정하고, (실제 현장에서) 이를 맞춰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는 "일단 (정부가) 현장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명확하게 목표로 삼고 나아갔으면 한다"며 "핵심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울타리를 먼저 만드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일이 후순위로 밀려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성년자 배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입법을 요구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미성년자 배우들은 법적으로 촬영 시간의 제한이 있었고, 그 중 일부를 수업 시간과 휴식 시간 등으로 규제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표준계약서에 구체적인 조항을 마련하고, 미성년자 배우의 권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전담 스태프를 정부에서 파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그는 "최근 관련법을 찾아보니 다른 부분들은 기존의 법만 잘 지켜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데, 미성년자 보호와 관련해서는 법 자체가 바뀌어야겠더라"며 "현장에서 미성년자 배우들은 '방치'되고 있다. 정부에서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건 (실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당함을 보았다는 게 중요하다"

"1년 간 연극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드라마에서는 보다 쉽게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발톱을 숨기고, 싸우지 마라' '그런 이야기는 좀 더 뜨고 하라' 등의 충고 때문에, 그동안 현장의 부당함을 외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하고픈 말을 삼키며 살아온 날들은 도리어 그에게도 상처가 됐다고 했다. 

"내가 '갑질'을 당해서 화가 났다기 보다 그런 광경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게 화가 나고 미안했다"는 허정도 씨는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단순함'이라는 무기를 장착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실명으로 글을 쓴 것 또한, 그간의 침묵에 대한 반성이자 '더 이상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의식과도 같다. 

"드라마를 못 할 수도 있다는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런 각오가 없이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죠."

구체적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놓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 복장으로 1인 시위를 할까, 청와대 게시판에 국민청원을 올릴까, 아직 스스로도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만간 뜻이 맞는 현장 종사자들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기로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다.

허씨는 '선한 사마리안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부당함을) 보았다는 게 중요하다. 보고 난 뒤에도 이를 외면하고 (부당함을 개선하는 일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새삼 얻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도, 이제는 보고 들었다.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새겨들을 때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나·김혜인 기자  neptune@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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