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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간첩이 될 수 있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조명한 현대사의 비극 오기현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 위원장l승인2018.01.30 12: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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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기현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 위원장] 어릴 적 우리 집 가까이에는 외숙모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마치 한 식구처럼, 우리가 이사를 가면 가까이 이사를 왔다. 동갑내기인 어머니와 친구로 늘 함께 지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일이라, 나는 의례히 외숙모는 우리 집 옆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조금 철이 들면서 외숙모가 우리 현대사 비극의 희생양으로, 잘못한 일이 없으면서도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대한민국의 나약한 한 여성이었음을 알게 됐다.

경주 토함산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자란 외숙모는 18세가 되던 해에 이웃마을의 외삼촌과 결혼했다. 외삼촌은 두 살 위로 아직 늦깎이 중학생이었다. 당시 경주지역의 결혼풍습은 결혼식을 올린 후 신랑신부가 일정기간 헤어져 살았다.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오는 의식인 ‘신행’ 전 까지 신랑은 날을 잡아 신부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 해 봄 외숙모가 살 던 마을에 천연두가 돌아 외부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아무도 접근 못하도록 가시 달린 탱자나무를 마을 둘레에 심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신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한국전쟁이 발발해 외삼촌은 징집되어 전선에 배치됐다. 외숙모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신혼이자 학생 신분이었던 외삼촌이 그 면(面) 지역에서 왜 가장 먼저 징집되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종갓집 맏이였던 외삼촌을, 사이가 좋지 않던 다른 성씨 집안의 면서기가 악의로 추천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외삼촌은 경주역 부근 공터에서 간단한 훈련만 받고 안강전선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외조부는 군번도 없는 학도병 아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앞에 거적을 깔고 석 달 간을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병을 얻어 곧 돌아가셨다.

열 아홉 청상과부가 된 외숙모는 평생을 수절했다. 기막힌 사실은 외숙모가 외삼촌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종갓집 맏이끼리 중매결혼하였으므로 혼인 전에는 서로 알 리가 만무했고, 혼인 중에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숙모는 외삼촌이 중학교 재학 중에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시집살이를 하던 외숙모는 작은 외삼촌이 결혼을 하여 맏이 노릇을 하게 되자, 시댁에서 나와 혼자 살았다. 그 뒤부터는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 동갑내기인 어머니와 시누이 올케 사이이자 친구로 늘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명문가도 아닌 외가에서 열 아홉 여성에게 왜 그렇게 가혹한 정절을 요구했느냐고 어머니에게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 시대 여자는 원래 그렇게 살아야 했다고 답했다.

▲ 지난 27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사라진 고문기술자들' 편 이미지. ⓒSBS

그런데, 외가 식구들은 한국동란에 아들 혹은 남편을 희생한 자랑스러운 ‘국가유공자 가족’이 아니었다. 인민군의 포로라도 되어 북한에 살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그것은 유가족을 옥죄는 무거운 굴레였다. 생존이든 사망이든 제대로 된 소식을 듣기 위해 수소문하다가도 혹시나 누가 알기라도 할까 가슴 졸여야만 했다.

만약 북한에 외삼촌이 생존하고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가족들이 화를 입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빨갱이 사상범의 딱지가 붙으면, 한 집안이 멸문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누구나 간첩이 될 수 있었다. 어느 집에 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는 확인 안된 소문이 밤안개처럼 늘 시골마을 사람들의 주위를 떠돌았다.

구조적인 공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직 출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누구나 고시에 합격해 판검사나 고위관료가 되길 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는 집단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보신책이었다. 집안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안전망이 구축됐다. 그렇지 않으면 극단적인 반공주의자 행세를 하거나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정말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1967년(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토함산 지역에 무장공비 세 명이 침투했다. 이 지역 빨치산 출신이었던 이들 중, 두 사람은 사살되고 한 사람은 동생의 권유로 자수했다.  자수한 무장공비는 아버지의 옛 친구였다. 훗날 전향해서 반공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아버지에게  행방불명된 외삼촌이 북한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알려줬다. 본적은 없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의 명단을 북한에서 본 적이 있다는 다소 막연한 이야기였다.

외갓집 식구들은 기적 같은 소식에 반가워하면서도, 더욱 가슴을 졸여야 했다. 혹시 외삼촌에 대한 소문이 새어나가 가족과 친인척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간혹 정보과 형사들이 찾아와 외삼촌 소식을 묻기라도 하면 그 날은 대사를 치른 사람들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쟁에 징집된 종손을 둔 집안 전체가 죄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90년대 후반부터 평양을 방문할 일이 종종 있었던 나는 북한측 파트너에게 혹시 외삼촌에 대한 소식을 물었지만 긍정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을 생전에 만날 수 있을까 학수고대하던 외숙모는 60대 중반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청상으로 늙어가는 며느리를 늘 안타까워하던 외조모도 마지막까지 아들 소식을 기다리다가 90세가 훨씬 넘어 세상을 하직했다. 이제 외삼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빨갱이 콤플렉스의 공포는 집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고문수사로 조작된 간첩사건을 추적해 그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죄로 단죄했던 법조인들은 여전히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간첩을 만들 수 있었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빨갱이 콤플렉스의 공포가 언제 또 우리를 덮칠지 불안할 뿐이다.


오기현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 위원장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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