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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살 은행나무는 말이 없다

[무소음세상③] 강화 교동도, 분단의 소리 안병진 경인방송 PDl승인2018.02.07 17: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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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인천 강화에 교동이란 섬이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로 간다. 이곳의 쌀이 유명하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몇 년 동안 밥을 먹는다는 소리가 있다. 교동 출신이라고 하면 집에 땅은 꽤 있겠거니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곳에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대룡시장이다. 활성화된 전통시장이 아니라 실향민이 모여 만든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한국 전쟁 이후 실향민이 된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데, 아직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오래된 가게들이 손님도 없이 문을 연다. 섬에 다리가 놓이고 나서 관광객들이 시장을 구경하러 온다.

작년에 이곳에 소리를 녹음하러 갔었다. 섬 여행 특집 취재가 처음이라 실패해도 좋을 만한 곳, 오가기 편한 연륙교가 있는 교동도를 선택했다. 마침 봄인지라 제비가 찾는다는 시장도, 오래된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소리도 좋은 아이템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섬에 가서 우리가 처음 들은 것은 검문하는 소리였다. 교동도는 연백이 보일 정도로 북한과 가까운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섬에 가려면 민통선을 넘어야 한다. 섬을 건너서도 특이한 소리가 들렸다. 대북방송이었다.

바닷가 철책에 놓인 대형 스피커에서는 ‘쌍팔년도’에나 들었던 톤의 목소리가 북을 향해 비난의 문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웬일인지 어린 시절 길에서 주웠던 삐라의 유치한 그림과 색깔이 기억났다. 소리를 녹음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군인들이 재빨리 나타나 저지했다.

막상 섬을 돌아다니자 교동도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었다. 갈아엎은 밭은 씨앗을 기다리고, 논은 물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봄의 시골. 뭐 다른 게 없을까 섬을 돌아다니다, 900년이란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가 있다는 무학리 마을을 찾았다.

은행나무가 무슨 소리를 내진 않겠지만, 그리 오래 살며 나무가 들었을 소리가 궁금했다. 물어도 나무가 대답할 리 없지만 지친 몸도 쉴 겸, 거대한 은행나무 아래에 녹음 장비를 설치하고 늘어지려 할 찰라.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셨다.

▲ 무학리 은행나무 앞에서 녹음하고 있는 모습.

"여기서 뭐해? 커피 줄까?"

"은행나무가 무슨 말을 해. 호호호."

"새소리 바람소리나 들었겠지. 뭔 소리를 들어. 호호호"

할머니는 은행나무 바로 앞에 사는 분으로 전쟁 통에 북에서 피난 내려온 뒤, 계속 그 집에서 살고 계신다고 한다.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 뭍으로 떠났다. 잠시 뒤엔 그 옆집 할머니가 오셨다. 좀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은행나무 소리 들으러 왔대. 호호호."

“젊었을 땐 여기에 줄을 메고 그네를 탔는데. 이제는 호호호”

"떡 줄까? 떡이나 먹고 가."

호호 할머니가 떡을 가지러 간 사이, 젊은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쟁 통에 교동에서 태어났고 아버님이 고향 연백으로 어머니를 남기고 월북하셨단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은행나무 옆에 살며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아가셨다. 이상하게도 이북에서 넘어온 호호 할머니보다 교동에서 태어난 할머니의 사투리가 더 심하게 들렸다.

"어려서 죽을 뻔 했디요. 여기 죽은 사람들 많아...."

"월북한 가족은 저기 바닷가에 한 줄로 세워 놓고 다 총으로 쐈다고 하더라고. 빨갱이 가족이라고..."

해가 지려 하자 마을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대남방송이다. 북한 노래가 들리더니 알아듣기 어려운 북한 여자의 목소리가 원혼처럼 대기를 떠돈다. 할머니들도 매일 듣는 소리인데 한밤중에는 그 소리가 무섭다고 한다. 소리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소리가 붙들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젊은 할머니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신다.

"전쟁, 전쟁 쉽게 말하는데. 무서워요. 전쟁나면 안 돼."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 소리를 듣는다. 나무의 넓은 품에 새들이 재잘거린다. 남에서 부는 지, 북에서 부는지 바람도 시원스럽게 지난다. 연신 호호 웃는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남방송에 섞인다. 말수가 별로 없는 젊은 할머니는 가을에 향교 제사 지낼 때 다시 오라고 한다. 밥상을 차려주시겠다고. 어둠이 내리자 무서워 개가 컹컹 짖는다. 물과 씨앗을 기다리는 넓은 논밭은 아무 말이 없다. 아무 소리가 안 나는 것도 무섭고, 소리가 나는 것도 무섭다. 나무가 말이 없는 이유도 무섭기 때문일까.

무학리 은행나무 아래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 나무는 암나무이며 수나무는 북한의 연백군에 위치하여 여름이면 꽃가루가 날라 와 지금도 은행이 가지마다 많이 열리곤 한다. 이 나무아래는 무학리 주민들이 여름철에 피서지로 사용하고 있다."

▲ 무학리 은행나무.

안병진 경인방송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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