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야!" 이름 불리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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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음 세상 ④] 사라진 아이들의 소리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나이를 먹는 것은 침묵에 익숙해져 가는 일이다. 소리쳐 외치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것이 편하다는 걸 세상이 가르쳤다. 삶은 나날이 단순해지고, 간결해진다. 만날 친구도 줄고, 만나서 할 말도 별로 없다. 스스로 세운 삶의 규칙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 틈은 없다.

시끄러운 것은 덩그러니 TV 뿐이다. 덧없이 가벼운 시계 초침 소리가 삶의 무게로 느껴지는 고독한 인생. 생의 끝은 결국 세상의 저편, 무음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궁극의 무음. 우리는 떠들썩하게 태어나 침묵으로 생을 마감한다.

▲ 지난 19일 오전 강원도 강릉 컬링센터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 여자 대한민국 대 스웨덴 경기. 김은정이 스톤을 던진 후 지시하고 있다. ⓒ뉴시스

“영미, 영미”

TV에서 동계올림픽 경기가 중계된다. 컬링 경기는 시끄럽다. 입을 꽉 다물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다른 경기와 달리 컬링은 아이들의 놀이와 닮았다. 영미와 동생 그리고 그 친구들의 놀이에 피식 웃음이 난다.

컬링 선수들 또한 다른 경기 선수들처럼 진지하지만, 빗자루로 청소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런 경기 규칙 때문에 그 진지함은 가벼워 보인다. 상대방의 경기를 단체로 턱을 괴고 바라보는 소녀 같은 선수들. 귀여운 모습도 그렇지만 웃음이 나는 건 선수들의 ‘소리’ 때문이다.

“영미~ 가야해!”

상대편이 들을까봐 눈빛으로 사인을 주고받는 다른 경기들의 비장함과 달리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소리. 전쟁 용어가 난무하는 올림픽, 근육질의 무거움을 비웃는 듯한, 아이같이 가볍게 튀어 오르는 발랄한 저 소리들. 경상도 사투리까지 써가며 영미와 그 일당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떠들고 소리칠 수 있었던 세계. 내가 컬링을 보며 즐거웠던 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아이들의 세계를 ‘소리’로 다시 들었기 때문이다.

집 앞에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어 골목을 누비던 소리. 구슬치고 딱지치고, 말뚝박기에 다방구, 고무줄놀이, 술래잡기까지 가능했던 구불구불한 골목길. 어른들께 시끄럽다고 혼이 나면 골목을 벗어나 지구 끝이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 여자 컬링 선수들이 들려준 소리는 골목은 사라지고, 도로만 남은 무소음의 세계에서 들린 신기루 같은 아이들의 세계였다. “영미야!”

얼마 전, 집 앞 초등학교에서 졸업식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해 졸업생은 50여명 뿐이었다고 한다. 한때 학생수가 3,000명에 이르렀던 이 오래된 학교의 학생은 지금 200여 명이다. 학년마다 학생이 40명도 안 되는 것이다. 예전처럼 아이를 낳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동네에 사람들이 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신도시로 떠난 동네에는 시골처럼 노인들만 남았다.

▲ 인천의 골목길( 9와숫자들 ‘수도국’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재개발의 광풍에서 비켜 있어 아직도 골목이 살아남은 조용한 동네를 바라본다. 가끔 골목을 지나가는 것은 노인과 고양이들뿐. 영미와 은정, 선영이가 뛰어놀았던 구불구불한 골목길. 누군가 놀자고 내 이름을 부를 것만 같은 고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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