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 낡은 틀부터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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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낡은 틀부터 깨자
저널리즘 복원 위해 '단독' 떼기보다 중요한 것은
  • 전규찬 언론연대 공동대표(한예종 교수)
  • 승인 2018.03.02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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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 MBC

[PD저널=전규찬 언론연대 공동대표(한예종 교수)] “그래서 한국 저널리즘 갑의 위치에 오른 JTBC 앵커와 기자들에게 우선 요구하고 나섰다. 약자에게 피해를 주고 진실의 가치마저 훼손하는 집착적 [단독] 플레이는 그만. 과욕의 [단독] 드라이브가 초래하는 문제점을 재고하고 잘못된 관행은 진지하게 반성해 철저히 고치라. 당장 솔선수범하라. 그런 위급한 상황이지 않은가.”

지난 1월 24일자 본 지면에 쓴 글의 일부다. 뉴스 전반에 ‘단독’ 증세가 만연해 있다. 조중동과 진보지, 공영방송, 지상파, 인터넷 매체 가릴 것 없다. 전 지구적 동시대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뉴스 전달의 시차는, 진정한 특종을 제외하고, 별 의미가 없다. 실속 없는, 자기 상품을 선전하는, 뻥튀긴 포장지에 머무는 ‘단독’들이 허다하다.

당장 고쳐야 한다. 시답지 않은 기사를 갖고, 마치 자기 것처럼 앞서 들이미는 ‘단독’의 공해를 끝내자. 심각한 풍토병의 퇴치가 저널리즘 생태계 복원에 중요하다. JTBC, 손석희 앵커가 먼저 움직여라. 물론, 모든 걸 책임질 수는 없지만, <뉴스룸>이 자책하고 개선에 나서면 그 여파는 분명 클 것이다. 그렇게 변화를 일으켜 달라.

손석희와 <뉴스룸>이 이런 시청자의 요구, 상식의 기대에 빠르게 응대했다. 내부 토론과 실험의 시간을 거쳐, 설혹 단독으로 취재한 경우라도 ‘단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용기 있는 선택이다. 모험의 길을 택한 데스크와 기자들의 판단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 타락할 대로 타락한, 도태의 막장을 보인 한국 저널리즘이다. 촛불혁명 후 ‘기레기’ 적폐의 청산은, 구조 개혁과 인물 교체 그리고 내용 실천에 덧붙여, 이런 구습의 탈피와 형식의 실험을 필요로 한다. 신뢰도 1위 채널의 판단은 뉴스 진화와 뉴스 생태계 개선의 주요 변곡점으로서 기록될 것이다. 결코 작지 않은 TV뉴스 혁신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영향력 1위’ 타이틀이 그런 식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JTBC의 결정은 타 채널, 다른 매체에 틀림없이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일파만파(一波萬波)라 하지 않나. 정확하게는, 일자파동만파동(一自波動萬波動). 하나가 주체적으로 움직여 파장을 일으키면 주변 많은 것들이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이는 물리적 감응, 변화의 공식이다. 작은 개시가 큰 결과로 이어지는 세계 운동의 꼴이다.

사회 진보의 모습이기도 하다. 패러다임 교체가 경계를 넘어서는 미시적 동작에서 개시된다. 그래서 결국은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이 말한 '폭발'의 순간이 융기할 것이다. 요컨대, 큰 변화 잠재력을 내포한 미동이다. JTBC의 결정에 주목하는 까닭이며, 사실 <뉴스타파>가 한참 전에 시작한 이 ‘단독’ 떼기를 광폭으로 실현하는 걸 지상파 뉴스의 공통책임으로 묻는다.

옳은 방향이니, 기꺼이 동참하라. ‘기레기’ 청산의 갈 길이기도 하니, 일종의 합의로서 함께 하라. 특히 공영방송이라면, ‘단독’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탐사취재의 정석으로 플레이를 펴는 게 옳다. 속도가 아닌 깊이로써. 그러면서, 필자는 정상화 노력에 바쁠 MBC <뉴스데스크>에 마찬가지로 개선했으면 싶은 것 하나가 있다.

박성호 앵커는 인터뷰에서 공부하고 고민하며 노력하겠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반드시 바꿔내겠다고 약속했다. 주변 이야기도 당연히 경청할 테다. 오랫동안 방치되고 망가져버린 뉴스룸에서 바꿀 게 얼마나 많겠는가. 분명 시간이 필요할 테며, 조급증을 갖는 건 데스크나 기자, 시청자 어느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서두를 게 있다. 당장 끊어낼 게 있다. 뉴스 시청자와 저널리즘 비평가 그리고 미디어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탁을 한다. 제발, 리포트 내용을 구성하고 전달하는 방식, 문체, 언어 스타일을 확 바꿔내라. 수 십 년 된 고리타분한 말투, 정형화된 표현, 진부한 문장은 이제 좀 갖다 버리자. 물론, 애정과 기대에 기댄 고언이다.

구체적인 예 하나만 들어보자. 2월 26일. <뉴스데스크>는 “평창 동계올림픽 선수단 해산…선수도, 국민도 즐겼다”는 제목의 기사로 올림픽을 마감했다. 앵커가 이렇게 말문을 연다. “평창올림픽의 성화는 어제 꺼졌지만 전에 없던 희망의 불을 밝혔습니다. 선수들이나 국민들, 그리고 언론도 메달 색깔에 이번처럼 연연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듣기 좀 민망하다. 나만 그런가. 국민도 즐겼다? 희망의 불을 밝히다? 국가행사 때마다 듣던 익숙한 수사다. 드라마다.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문구들. 선수와 ‘국민, ’언론‘ 모두가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멘트는 대체 어디서 나왔나? 현실에 기반하나, 아니면 소망의 표현에 가깝나? 과장된 언어가 우호적 정동의 효과를 낳는 건 결코 아니다.

기자의 리포트가 이어진다. “메달 색깔보다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했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는 순위와 상관없이 아낌없는 응원이 이어졌습니다.” “또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선수들은 도전 자체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 국민들에게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말 그대로 선수도, 국민도 그 자체를 즐긴 축제의 무대였습니다.”

미담에 가깝다. 너무나 극적인 미사여구다. 이런 미화는 팩트 뉴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진실 추구의 저널리즘과도 거리가 멀다. 1988년 올림픽 때나 어울리는, 집체주의적인 말투. 국가주의 뉘앙스가 강한 문구들이다. 이런 신화에 묶이고 환상을 쫒는 뉴스가 이질적 감각들과 분열적 정체들로 구성된 2018년 한국사회의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다가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런 레토릭에 익숙한 기성 시청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협의의 공동체 울타리에 더 이상 갇히지 않는 요즘 젊은 독자들의 취향에는 한참 뒤질 게 틀림없다. 민족국가의 경계 안에 젠더와 세대 등의 선을 따라 산개해 충돌하다 가끔은 경계마저 훌쩍 넘어 이탈하는 포스트모던 초국적 감수성을 결코 쫒지 못한다.

누구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은가? 어떤 대중교통을 희망하는가? 미래 주체와 감응하지 못하는 언어로는 안 된다. 그들의 변화하는 욕망과 정체, 스타일을 표현하는 뉴스는 결국 시장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억압이 초래한 것과는 또 다른 위험 상황, 언어지체 현상이다. ‘단독’ 경쟁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저널리즘은 서둘러 구태의연한 언어, 케케묵은 표현, 낡은 문체와 선전선동의 수사에 구속된 기사 작성의 습속, 뉴스 전달의 형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걸 공영방송 MBC가 앞장서 달라는 요청이다. 당연시된 집단적·국가적·애국적·민족적 문체·수사들과 결별하기. 저널리즘의 공간, 뉴스의 시간을 적확한 사실적 언어, 진실의 언어들로써만 채우기.

과한 욕심인가? 지나친 비판인가? 어쩜 ‘단독’ 타이틀을 버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겠다. 뉴스생산의 장 내 대다수 기자, 데스크의 무의식에 침투한 이데올로기 심리의 체화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걸 의식으로 끄집어 바꿔내는 고역, 그것을 공영방송 MBC 정상화의 꼭지로 지금 부탁하고 있다. 작다고만 볼 수 없는, 중요한 문제다.

형식은 내용의 집이다. 둘은 변증법적으로 어울리며, 어느 하나를 무시하면 다른 하나도 후퇴하고 만다. 저널리즘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쳐진 낡은 문체, 구린 서사는 시대에 앞선 사실의 발굴, 진실의 추적을 발목 잡을 것이다. 뉴스는 드라마, 영화가 아니다. 저널리즘은 늘 비판의 칼날을 세운 냉철한 실천이다. 언어와 형식은 이를 적절히 담아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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