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위에 군림한 '형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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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기레기’가 형님이라 부른 사내①

[PD저널=전규찬 언론연대 공동대표(한예종 방송영상과 교수)] 역사의 영웅은 못 되더라도, 작은 이야기 한 편을 차지할 인물은 세상에 쌔고 쌨다. ‘기레기가 형님이라 부른 사내’라는 제목을 단 이 아마추어 소설의 주인공도 그 중 한 명이다. 이 글은 그가 펼친 20대 이후 삶의 사실적 기록이다. ‘나’의 진실한 이야기 행적이기도 하다.

혹자는 웬 소설이냐고 비아냥댈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소설이란 모두 허구고 허구는 곧 가짜로 보일 테니까. 반대로 저널리즘은 오직 진실을 좇고. 진짜 그런가, 기레기들의 이야기가 단단한 사실들로 가득 차있단 말인가.

각설하고, 이 나라 최고 명문대 무역학과의 졸업장을 손에 쥔 그가 ‘별세계그룹’에 입사한 건 1970년대 말. 외로운 각하가 측근 부하의 분심은 짐작도 못한 채 안가에서 향연을 즐길 무렵이다. 최고재벌 사원이 된 그는 열심히 청춘의 야심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다. 무소불위 각하는 비명횡사한지 한참 전이고, 그의 졸개 쿠데타 대장들이 줄줄이 대통령직을 해먹고 떨어진 후다. 재야의 YS 고수가 ‘세계화’ 기치를 걸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그 해, 그도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다우’ 등 다른 종합무역상사과 마찬가지로, ‘별세계물산’도 변모하는 무역 조건과 경영환경에 맞춰 새로운 살길을 찾을 때다. 군복 벗고 군기 빠진 민주 정권과의 코드 맞추기가 속사정이었을 수도 있다. 탈색. 새로운 피가 필요해. 약관 40세의 그가 전략경영팀장이 된다.

▲ 2017년 8월 25일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사실, 제 역할은 물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그룹 전체의 2000년 장기 비전을 마련하는 게 내 책임입니다. 글로벌화 시대에 맞춰 그룹의 사업구조를 재조정하고 경영체질을 개선하는 역할입니다. 몇 개월 만에 뚝딱, 기능과 효율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 최종보고서를 제가 써냈습니다.

실천과제로 이런 걸 포함시켰습니다. 전문인력 양성과 고객서비스 배가, 품질수준 향상. 아참, 중요한, 정보력 강화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좀 멀리 내다봤죠. 중앙정보부 갖고 국가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는 막 내렸잖습니까. 문민화 시대에 맞춰, 재벌도 국가에 버금가는 튼실한 ‘정보력’을 갖춰야 살아남는다. 뭐, 이런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윗사람들이 리포트를 잘 본 것 같고, 저는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보로 물산 경영임원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IMF 사태가 터진 해에는 정식이사가 되는데, 나는 그룹 전체를 관장하는 비서실 소속으로 전자 중심의 수원거점시대를 내세워봤습니다. 요즘 말로, 그룹의 빅픽처를 그렸다고 할까요. 내겐 늘 그런 큰 일이 맡겨졌습니다.

2000년대 초 상무를 거쳐 전무의 직위에 올랐을 때, 그는 불과 47세의 나이였다. 요즘 말로 ‘깜놀’할 일이다. 나중에 순시리 말 타기 협회 돈대기 스캔들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게 될, 현명한 회장을 옆에서 모신다. 그런데 그에게는 사실 더 중한 역할이 맡겨져 있었다.

별세계 구조조정본부의 일이다. 외환위기 때 폐지된 비서실을 대신해 만들어진 무소불위 조직의 기획팀장 자리다. 나중에 비자금 비리를 폭로한 ‘용처리’ 전무가 법무팀장을 맡았고, 학수 부회장이 짱인 그런 브레인 조직이다.

정권을 향하고 국가도 움직일 말 그대로의 권세다. 노회한 정권의 말기라고 해도, 그가 이렇게 대놓고 떠들 수 있는 까닭이다.

“북한 핵 개발 문제가 사찰이든 뭐든 국제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남북관계는 물론 대북사업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업의 대북사업에 냉각기가 필요해요.”

“우리로서는 개성공단 같은 데서 사업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별세계는 사상 최대 실적을 자랑하고, 그는 부사장의 자리에 올라 기염을 토할 때다. 자신만만하다. 그런데, 어라, Roh가 DJ를 잇는다. 정치 환경이 불투명해진다. 별세계가 기민하게 움직인다. 위기다. 아니, 기회다. 구조본 기획팀장인 그가 ‘신경영’의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구조본에서 기획·대외관계를 책임진 나에게 사람들은 ‘불도저와 돌다리’라는 별명을 붙어주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영원한 자유주의자’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뭐, 아이디어는 늘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2006년 X파일사건이 터지고, 그룹은 사회공헌안을 발표합니다. 구조본이 ‘전략기획실’로 축소 조정되는데, 나는 기획담당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그룹홍보 일을 오래 맡아온, ‘재계 홍보의 대부’로 통한 사람과 짝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곧 그가 물 먹었는지 전략기획실장 보좌역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습니까? 기다렸던 기회가 왔습니다. 기획홍보팀장. 그룹홍보라인 최고 사령탑의 자리가 제게 운명처럼 주어졌습니다. 별세계 내 아들후계체제가 빠르게 구축되어갈 딱 그 타이밍의 일이죠.

회장 아들이 전자의 전무로 승진하고, 신체제 강화에 맞춰 전자 쪽 홍보라인도 지상파 앵커출신의 전무체제로 개편할 때죠. 소속 경제연구소를 최고민간정보기관으로 만든 고등학교 후배를 측근으로 기용했습니다. 어떤 기자가 아들후계구도에 맞춘 ‘정통 홍보맨’ 일선퇴진라고 썼는데, 틀리지 않았습니다. 별세계의 미래를 위한 대언론홍보라인 세대교체가 맞았습니다.

솔직히 평소 그룹홍보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불만을 좀 표했었죠. 당시 한 경제지가 그룹의 ‘홍보 3대과제 특명’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놓던데, 상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룹후계 체제에 맞춰 대언론홍보 전략에도 중대 변화가 있었고 내가 그 중심에 있었다. 뭐 이 정도만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아뿔싸, 또 다른 위기가 그와 그룹에 불어 닥친다. 구조본 팀원이던 ‘용처리’ 변호사가 나가 배신을 때린 것이다. 양심선언을 해 마구 비자금을 폭로한다. 별세계 정치인 로비 핵심부서로 구조본을 지목했다. 우리의 주인공을 별세계 정보정치의 관리자라고 콕 집었다.

이 절체절명의 때를 대비한 오랜 투자의 노력이었던가? 홍보기획, 언론관리의 효과가 유감없이 나타난다. 신문방송들이 조직적으로 사건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진상을 축소·은폐하기 급급했다. 아무도 진상을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다행이라 그는 생각한다.

‘무늬만 특검’이 출범하고 그와 학수 씨를 상대로 한 시늉만의 조사가 이루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기자들은 ‘사실 부인’의 사실을 전하기에 바쁘다. 진실 추적에 나서는 법이 결코 없다. 검찰이 회장의 무죄 처리 가능성을 슬쩍 흘리면, 언론은 이를 침묵으로 승인한다. 아싸!

어떤 비판지가 “저주능 특검 ‘면죄부 수사’ 의혹 증폭”과 같은 딴지성 기사를 실을 수 있자. 그래도 “별세계 특검 ‘면죄부 수사’ 주장 반박”이라며 검찰을 슬쩍 편드는 기사들이 벌떼같이 이를 덮어버릴 것이다.

“별세계 특검, ‘로비수사’ 박차”라며 은근히 띄워주는 뉴스가 엠빙신 같은 TV를 통해 또 방송될 테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면 저들이 알아서 적당히 처리한다. 그게 홍보의 진수지.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직 결과만 남는다.

시간이 어물쩍 지난다. 돈 욕심 많은 재벌 건설사 사장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 기다렸다는 듯, 특검은 대부분을 무혐의 처리하며 꼬랑지를 내린다. 그도 면죄부를 받는다. 역사를 위해, 우리는 특검 결과 발표 전문 중 주인공과 관련된 대목을 그대로 기록에 남길 것이다.

김용철은 검찰 이외 정관계, 언론, 학계, 시민단체 등에 대한 로비에 관해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진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고, 김용철이 지목한 삼성의 로비담당자 대부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하였음에도 아무런 로비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시로 변하는 김용철의 진술만을 근거로, 삼성그룹의 전반적, 조직적 로비체계가 구축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계속 수사해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되어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픽션으로 돌아가자. 사건이 그렇게 뚝딱 정리된다. 이미 떼를 이룬 기레기들은 군말 없이 모든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흐지부지. 그와 별세계가 딱 원했던 대로다. 또 하나의 가족은 이렇듯 아름답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막역한 사이가 최고다.

기획홍보란 게 뭔가. 힘들 때 서로 믿고 지켜줄 찰떡궁합의 의리관계를 두루 맺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위기 상황에 빛나는, 어둠에서 희망을 얻는 투자, 그게 바로 관리다. 물론 그가 이런 어록을 남겼을 리 만무하다. 소설로 복원한 허구의 진실일 따름이다.

언론플레이가 쭉 펼쳐진다. 별세계가 ‘경영쇄신안’이란 걸 내놓는다. 아버지 회장이 사원증까지 반납하며 완전 퇴진하는 연극 무대가 펼쳐진다, 학수 부회장 등이 뒤를 따른다. 전략기획실이 전격 해체되고, 사장단협의회라는 게 돌아갈 것이다. 더 잘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럼 우리의 주인공은 어떻게 돼나? 그는 원 소속사인 물산의 사장 보좌역으로 북귀한다. 그렇게 그의 생명, 우리의 소설은 끝나고 마는가. ‘기레기가 형님이라 모신 사내’의 그 기레기들은 대체 어디로 갔나. 독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할지 모르겠다.

실망하지 마시라. 우리는 이제 겨우 1막을 접었을 뿐. ‘MB씨’와 함께 개시되는, 아들 회장 신체제 하, 그가 기레기들과 함께 펼치는 2막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박그네’로 이어지는, 그와 기레기들이 주고받은 유치찬란하고 은밀한 문자질 '생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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