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삭제한 헌법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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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개헌" 이념공세 펴는 보수세력... '식민주의 잔재' 바닥부터 손봐야

[PD저널= 전규찬 언론연대 공동대표(한예종 방송영상과 교수)]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6일 헌법개정안을 발의한다. 보수 지배체제의 반발과 우익 기득권 세력의 대항이 예상된다. 극우매체들이 이미 가세했고, 조중동 신문도 곧 조직화될 것이다. ‘사회주의적’이니, ‘좌파적 개정안’이니 하는 이념공세를 펼칠 게 틀림없다.

대통령 연임제를 도입하고 선거권을 18세로 낮추기 때문인가. 4년 연임에 현 문재인 대통령은 해당되지 않더라도 투표 참여 가능한 연령을 낮춘 게 진보정권 집권에 유리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고 지역분권과 균형발전을 강조하며 수도조항을 신설했기 때문인가.

‘국민행동본부’가 당장 “‘국민’이 지워진다. 국민이여 일어나 ‘악한 개헌’을 저지하자”는 광고를 <조선일보>에 실었다. “주권자인 ’국민‘을 헌법에서 지”웠다고 개정안을 성토한다. ‘근로’라는 말 대신에 쓴 ‘노동’이라는 표현을 갖고도 곧 난리를 펼 태세다.

‘근로’하는 ‘국민’의 권리보다 의무에 기초한 자본국가 체제. 그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하는 사람의 천부적이고 보편적인 기본권을 인정하는 개정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국민행동본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정부가 제출한 헌법 개정안은 ‘국민’과 ‘사람’을 병기하고 있다. 기본권의 주체로서만 ‘사람’을 쓸 뿐, 사회권적 성격이 강한 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하고 있다.

정부안은 이런 보수우익 통념의 반발을 고려해 ‘국민’을 어정쩡하게 존치시킨 반쪽자리 개정안에 다름없다. 부분적으로 지우고 다르게 바꾸었지만, ‘국민주권’의 핵심 개념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이상하다. 왜 ‘사람’으로 싹 바꾸지 못하나.

▲ 조국 민정수석이 지난 21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기자들의 대통령 개헌안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과연 ‘국민’은 버릴 수 없는 것인가. ‘국민’이라는 표현을 빼면 헌법 조문은 성립이 되지 않는가. 모든 ‘국민’을 모든 사람으로 대체한 헌법은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한가.

나는 ‘국민’이라는 말을 거부한 지 오래다. 글에서 절대 쓰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나보다 국가를 먼저 앞세우는 단어, 네가 아닌 국가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용어, 우리를 국가의 주체로 호명하는 표현을 어떻게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냐고.

너와 나, 사람을 국가의 신민 정도로 위치시키는 ‘국민’은 전체주의의 산물이다. 당연히 받아들이고 마땅히 여길 자연스러운 언어가 아니다. 권력이 강조하고 반복해 쓰면서 자연스럽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특정한 사상에 기초한 역사의 특수한 용어일 따름이다.

정확히 말해, 식민지제국주의 유산이다. 히틀러 총통의 광기어린 국가사회주의과 함께 발흥했고 전쟁을 일으키는 흉포한 일제·일황 파시즘체제하에서 융성한 ‘국민’ 담론. 권리보다는 의무를 앞세우고, 전쟁의 동원으로 이어지며, 지배와 순종을 조장하는 상상의 기표에 불과하다.

그런 지배이데올로기는 애당초 민주공화국 헌법과 어울리지 않았다. 해방 후 대한민국헌법의 근간이 되는, 민족주의 임시정부 헌장도 처음부터 그 개념을 기각했다. ‘국민’, 그 불순한 형용은 헌법의 구성, 국가 법체계 제정의 과정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1919년 제정되어 이후 몇 차례 개정된, “자유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보자. 그 역사적 헌장은 우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제1장 총강 제1조에서 못 박으면서, 제4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다고 규정한다.

‘인민(人民)’이라는 단어가 눈에 뜨일 텐데, ‘인(人)’이라는 표현과 번갈아 나타난다. 여러 권리와 의무를 갖는 대한민국 ‘인’이다. ‘사람’이 이렇게 민족의 독립과 국가구성의 의지, 헌법 제정의 뜻과 처음부터 함께 했다. ‘국민’은 애당초 아니었다.

그러면서 선조들은 지혜를 발휘한다. 오늘날 우리의 고민을 예견해서 일까. 임시정부 헌장 제1장 제3조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원칙상 한국 민족으로 함” ‘국민’을 악착같이 버린다. 이런 일관성과 융통성을 왜 21세기의 헌법은 발휘할 수 없나.

해방되고 1948년 여름. 유진오 등 헌법기초위원회 소속 다섯 명의 전문위원들이 정부수립에 맞춘 헌법초안 작업으로 분주하다. 서상일 헌법기초위원장, 초안 마련에 핵심 역할을 한 유진오 공히 대한민국헌법은 임시헌장의 이념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천명한다.

실제로, 헌법 초안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임시헌장 국체규정을 그대로 옮긴다. 제 2장에서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 규정하면서, 인민이 경제적·사회적으로 누릴 동등하고 강화된 권리를 강조한다. 1948년 6월 6일자 <동아일보>가 그렇게 전한다.

그런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6월 27일 위 신문은 헌법 초안에 대한 제헌 국회의원들의 질의와 이에 대한 서상일, 유진오의 답변 과정을 옮긴다. 중요한 대목이니, 기사의 일부를 직접 옮겨보자.

‘인민’과 ‘국민’의 차이 여하는? (박윤원)

(답) 역사적으로 보면 인민이 먼저요 국민이 후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적 입장에서 인민을 보아야 할 것이므로 인민이라는 것보다 국민이라 부른다. 인민으로서는 국가적 생활을 한다면 그대로 인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나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헌법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국민이라 한다.

20여일 만에, 무슨 이유인지, 유진오 등 헌법학자들이 인정한 ‘인민’이 빠진다. 그 자리를, 모두가 청산할 식민지 파시즘의 적폐로서 거부한 ‘국민’이 채운다. 대체 무엇이, 어떤 ‘국가적 입장’이 이런 변치·복고를 가져왔을까.

1948년 2월 북조선민주인민공화국이 헌법을 제정‧발표한다. 조선민주공화국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고 명시할 것이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정황이 ‘인민’을 공산주의 언어로 만들어 버린다. ‘인민’은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말이 된다.

그렇게 적의 식별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진다. 왜곡이 발생하며 색깔이 덧씌워진다. ‘인민’이 이념에 의해 뒤틀리며, 식민주의 잔재이자 군국의 언어인 ‘국민’이 순치되고 부활해서 민주공화국의 제헌헌법에 버젓이 자리를 잡게 된다.

역사정의에 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 헌법의 슬픈 역사다. 냉전에 힘입어 득세한 친일파 반민족 기득권. 그들은 전체주의 사상(思想)의 조각인 ‘국민’을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초미에 박아 넣는다. 부재한 정통성을 구태의 언어로 보수하고 은폐한다.

이후 반공주의와 함께 발흥한 폭력적 국가주의, 억압적 국민 동원의 신화체계가 혹 이 ‘국민’의 사상(寫像)은 아닌가. 부정한 국가와 불의의 정권이,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물론이고 이명박·박근혜의 파시즘체제가 ‘국민’ 헌법의 산물은 아닌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재구성은 반민주, 반정치의 헌법적 원천을 방치한 채 과연 가능한가. 불의의 탄핵을 넘어, 인권이 보장되고 시민의 삶이 가능한 민주정치·사회민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헌법, 헌법의 ‘국민’을 바닥에서부터 손봐야 하는 게 아닌가.

촛불혁명이 이런 래디컬한 질문을 제기했다. 촛불시민들은 단순 대의제의 재구성이 아닌, 헌법의 제(개)정을 직접행동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그 역사에 순응해 들어선 정권이 막 헌법개정안을 제안했다. ‘국민’을 부분적으로만 ‘사람’으로 바꾸면서다.

아쉬운 개헌안이다. 그래도 역사의 순리를 따른. 의미 있는 내용이 많다. 그것에 대해 보수우익세력은 ‘국민’이 지워졌다고 난리다. ‘악한 개헌’이라며 반발한다. 남북 해빙에 반공으로 맞서는 식이다. 이 첨예한 개헌정치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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