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훅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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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훅 간다
[무소음 세상⑥]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라디오
  • 안병진 경인방송 PD
  • 승인 2018.03.26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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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책상에 전기 모기채와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펼쳐보니 회사를 떠나는 후배의 메모가 있다.

‘선배님 ㅜㅜ’

지난해 이 후배와 소리를 녹음하러 섬에 다녀왔다. 회사를 관두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았나 보다. 겉으로는 덜렁거렸지만 세심하고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이 친구의 별명은 ‘이담에’. 섬에 녹음하러 다니며 내가 찍고 싶었던 B급 다큐 <봄날은 훅 간다>의 여주인공이었다. 함께 작업한 사운드 엔지니어 이름은 ‘유지방’. 우리는 섬을 다니며 라면을 많이 끓여 먹었다.

후배가 남긴 책은 <자연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저자인 버니 크라우스(Bernie Krause)라는 미국의 음악가이자 생태음향 전문가이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지구를 돌아다녔다. 이 분은 스케일도 화려해 아마존 밀림부터 툰드라, 체르노빌, 보르네오 밀림, 심지어 바다 속까지 녹음을 위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그동안 15,000여 종의 생물 소리를 녹음했고 그 기록만 해도 4,500 시간이라 한다.

세계 오지 여행으로 멀미가 날 지경이지만 책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생물들은 생존을 위해 소리를 내지만, 각기 다른 주파수 대역으로 소통한다. 간혹 주파수 충돌이 생길 때는 시간을 나눠 쓰면서 분쟁을 해결한다. 안정된 서식지의 자연 소리는 완벽한 오케스트라다. 자연의 조화로운 소리는 생존을 위한 생물들의 현명한 선택이다.

▲ 강화 석모도 보리밭에서 바람 소리를 담는 모습.

후배가 남긴 책은 <봄날은 훅 간다>의 후속 기획안이 됐다.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자연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산업과 그 유산들 때문이다. 이들은 산업화 시기 같은 주파수대의 듣기 싫은 괴상한 소리들을 내왔다. 하지만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기계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무소음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강요된 고요와 고독 속에서 인간은 AI와 대화한다. 온기 없는 기계가 사람의 소리를 대신하고 사람 대신 사물을 통제한다. 하지만 이같이 모두 같은 주파수대를 쓰는 시대에 분쟁이 일어나는데…….

기획안을 쓰다 보니 자꾸 소설이 된다. 기획안의 정체가 불명확해서인지 제작 지원도 안 되고, 협찬도 어렵다. 요즘 나는 제작비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애쓰고 있다. (이 글을 빌어 관심있는 기관과 기업의 제작지원을 바랍니다!) 자연의 소리, 우리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가치 있는 소리들을 기록하고 그 기록에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입체음향(Immersive Sound)으로 사운드를 극대화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하고, 더불어 다큐도 만들고 싶다. 음성인식, 4차 산업시대, 사물인터넷 시대에 이르러 ‘사운드’의 가치와 중요성이 재조명 받고 있다.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잊힌 ‘사운드 매체’, 라디오가 소환될 시점이다. 라디오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봄이 왔다. 책상에 전기 모기채와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모기와 전쟁을 치르며 녹음을 하러 다닐 때가 왔다. 미세먼지 소리도 담아야 한다. 소리 내지 않는 것들, 무소음의 세상을 어떻게 ‘소리’화 해서 담을 것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 라디오맨의 고민이다. 일단 나가자! 기획안만 쓰다가 봄날은 훅 간다. Radio Is A 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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