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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기행’을 통해 깨달은 것

독일인 다니엘과 함께한 4·3특집기획 ‘입도의 길’ 제작기 이승민 제주KBS PDl승인2018.04.04 12: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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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이승민 제주KBS PD] “제주도에는 동굴이 많아서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거기서 자주 놀았거든요? 사람 뼛조각을 엄청 많이 봤어요. 아직 묻혀있는 유골도 많을 거예요.” 4‧3 70주년 추념식 장소로 가달라고 하자 택시기사님이 대뜸 하신 말씀이다. 끄덕끄덕. 천혜의 자연을 누리러 온 관광객이 들었다면 소름끼칠 이야기지만, 나는 얼마 전 다녀온 애월읍 빌레못동굴을 떠올렸다.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된 빌레못굴은 길이가 무려 1만 1749m에 이르는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다. ‘빨갱이 잡겠다’는 토벌대와 그에 맞서 제주를 지키겠다는 무장대. 그들의 원대한 목표는 이념 다툼과 원인모를 광기로 변질됐고, 그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무고한 도민들은 기어이 이 굴로 숨어들었다.

끝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굴속으로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간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옅은 희망을 좇은 결과가 훗날 동굴탐사대에게 유골로 발견되는 일일지라도, 동굴 더 깊숙한 곳으로 내달려야 했던 그 절박한 마음을 짐작해본다. 잠시 울컥한 순간 택시기사님이 또 한마디 하신다. “내가 들어간 동굴은 자연동굴도 아니었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진지동굴라고 아시나?” 아오, 갑자기 열이 확 오른다.

▲ 독일에서 온 방송인 다니엘과 강성규 KBS 아나운서가 4.3유적지를 돌아보고 있다. ⓒ이승민 PD

제주 4‧3은 역사적 맥락을 함께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건이다. 해방 직전까지 제주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해 전투에 유리한 진지동굴을 수도 없이 만들고, 이 섬을 일본군 6만 명이 주둔할 전략기지로 전락시켰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었으니 도민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런데 웬걸, 일본군 앞잡이를 하던 이들이 섬을 휘젓고 다니질 않나, 미군정이 미곡수집령을 내리질 않나, 남한 단독선거 얘기가 나오질 않나 세상이 영 이상하게 돌아간다. 힘든 시절 다 끝난 줄 알았던 그때, 도민들의 울분과 저항의 열기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만하자. 우리 이제 좀 사람답게 살자. 내가 이해하는 제주 4.3은 “이제 그만하자”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놀랍게도 그들은 순식간에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얻었고 섬 전체가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혔다. 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죽창으로 찔리고 폭포에서 던져지고 밭에서 총살당한다. 비극에 휘말린 당사자들조차 내 삶이 왜 이렇게 흘러가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불과 70년 전 일이다.

KBS제주총국이 제작한 <입도의 길>은 독일에서 온 다니엘과 육지에서 온 강성규 KBS 아나운서가 제주 전역의 4‧3유적지를 여행하며 4‧3에 대해 알아가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제목은 섬 밖에서 온 출연자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지만, 입도한 지 1년도 안 된 새내기 도민으로서 진짜 제주의 모습을 알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비추어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돼 KBS는 공정방송을 위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일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파업 집회만 줄곧 다니던 나는 집회 현장에서 만난 ‘다크투어’로 4‧3의 실체를 처음 접했다. 그게 이 아름다운 섬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기점이었던 것 같다.

업무 복귀 후 4‧3아이템을 맡게 되자, 조금 건방진 생각이지만 나는 섬 밖의 누군가도 내가 경험한 빛나는 깨달음을 발견하길 바랐다. 직간접적으로 제주에 ‘입도’해야만 얻을 수 있는, 몰랐던 제주의 모습을 알게 되는 일. 제주를 새롭게, 더 깊이 보게 되는 일. 고로 이 프로그램의 타깃은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인지하고 있는 도내외 대다수의 사람들이며 4‧3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실린 몇 줄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토록 뜬구름 잡는 내 기획의도를 구체화할 수 있게 해준 출연자들에게 더 고마워진다.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을 섭외할 즈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가 제주도 편 촬영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니엘이 독일 친구들을 데리고 제주를 여행한다면 아마 이 섬의 가장 화려하고 멋진 모습들을 보았을 텐데, 불과 한 달 전까지 몰랐던 제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는 모습을 찍고 싶었다. 다행히 역사에 대한 다니엘의 관심과 4‧3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태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다니엘의 일정과 제작비 여건을 고려했을 때 제주 전역 16개의 4‧3유적지를 3박 4일 동안 돌아야만 했다. 이 말인즉슨 나흘의 촬영으로 20분짜리 총 7회분을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다니엘은 고된 촬영일정으로 굉장히 고생하다 십 년은 더 늙어서 간 것 같다. 그 덕분에 프로그램은 활력을 얻었지만.

4‧3가이드 역할을 한 강성규 아나운서에게는 사실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크다. 4‧3을 너무 무겁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 이 마음은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을 만나면서 더 확실해졌다. 4.3을 겪지 않은 청년들이 이에 너무 관심이 없으니 진입장벽이 낮은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4‧3에 대해 거의 몰랐다가 알아가는 인물을 원했고 그런 점에서 성규 아나운서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독일인이 4‧3을 몰랐던 것과 한국인이 4‧3을 모른다는 것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바로 ‘부끄러움’이다. 성규 아나운서는 실제로 촬영 전에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해왔다.

그럼에도 여행 중 몰랐던 것들이 나오고 다니엘은 자꾸 질문하고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PD는 그의 부끄러움과 부담감을 편집 과정에서야 발견하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이 굴뚝같지만 “몰랐다”, “부끄럽다”, “반성한다”고 말하는 부분만 ‘악마의 편집’으로 ‘붙여넣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막을 수도 없다.

한편으로는 그를 통해 자꾸 엿보이는 ‘부채감’이 내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4‧3을 알리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주된 목표지만, 가르치기 보다는 우리 모두 같이 느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숨겨진 슬픈 역사와 너무도 대비되는 아름다운 제주,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느끼는 그 복잡한 심정.단지 비통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되지 않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슬며시 비집고 올라오는 부채감을 우리 모두가 솔직하게 느끼기를 바란다.

▲ KBS제주 '입도의 길' 제작진과 출연진. ⓒ이승민 PD

<입도의 길-4·3기행 편>은 하나의 감정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좀 제멋대로다. 부족한 능력 탓도 있지만,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굴곡이 있는 그대로 보이길 원했다. 철부지같은 모습으로 이곳저곳 다니다가도 곧 오묘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혹은 우리의 ‘순간’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한다.

솔직히 4‧3아이템을 어떻게 젊은 감각(?)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냐며 회의적이었는데, 처음 이 아이템을 제안한 국장님을 비롯해 제주총국의 선배들, 내내 촬영을 함께 다닌 아일랜드tv팀을 보면서 느꼈다. 제주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접근할 수 있구나. 무거운 주제여도 그 지역과 사람들, 이 땅이 거쳐 온 시간에 대한 큰 애정이 있으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가볼 수도 있다고. 


이승민 제주K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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