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 화면 편집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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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의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봄이 온다' 제작 후기

[PD저널=김명진 MBC PD] 10년만이었다. 2008년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 방송팀으로 참여한 후 다시 방문한 평양. 당시 삼엄한 감시와 생활에서의 불편함 때문이었는지, “동무는 내 가만보니... 자유분방하오. 내 지켜보갔시오!”라고 겁박(?)을 받아서인지, ‘다시는 안 올거야’라고 마음먹었던 평양. 그곳에 결국 다시 오게 되다니. 10년이라 강산도 변했고 양국 지도자도 바뀌었는데 지금의 평양은 어떨까.

가수들이 속해있는 본진보다 이틀 일찍 평양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서 내리니 바로 평양 순안공항 활주로였다. 50분.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이곳에 오기가 이리 힘들다니.

내리니 바로 수십 명의 수행원인지 또는 감시원인지 모를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선발대로 간 8명의 MBC 직원에게도 3명의 전담마크(?)가 붙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 붙어있는 닮은꼴 두 사람의 배지(badge)를 보자 실감이 난다. ‘아. 북한이구나.’

너무 다른 남과 북의 방송용어

고려호텔에 짐을 풀고는 곧바로 첫날 공연 장소인 동평양대극장으로 향했다. 중계방송을 위한 장비는 모두 조선중앙방송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양측이 회의를 시작했다.

“남측은 몇 통로를 쓰십니까?”

“???” “통... 통로요?”

“네 통로말입네다.”

통로가 채널의 북한말이라는 걸 아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떨어져 산 세월만큼 언어도 달라졌으리라. 특히, 분단 이후에 생겨난 용어들은 남북이 확연히 달랐다. 텔레비전은 분단 이후에 생겼다. 그만큼 북한의 방송용어는 예측이 어려웠다. 블랙화면은 ‘먹판’, 컬러바는 ‘띠판’, 최종 리허설을 뜻하는 ‘런쓰루’는 ‘관통’으로 불렀다.

“연출가 선생. 관통은 언제할기요?”

“네??? 뭘 관통해요???”

▲ 지난 1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예술단 '봄이 온다' 공연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

갑작스런 공연시간 변경과 김정은 위원장의 등장

두 번의 공연 중 첫 공연은 4월 1일 일요일 ‘동평양대극장’에서, 두 번째 공연은 4월 3일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치러졌다. 남북합동 공연이 있는 두 번째 녹화가 훨씬 규모가 큰 공연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두 번째 공연에 ‘어쩌면’ 보러올 수 있다.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라고 우리 측 관계자로부터 들은 게 전부였다.

대망의 첫 공연. 공연 시작은 저녁 5시 예정이었다. 최종 리허설을 막 시작하려던 오후 2시. 갑자기 7시로 공연시간을 바꾸겠다고 북측이 통보했다. 남한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곳은 북한이었다. 2시간이 늦어져 좀 더 여유 있게 녹화 준비를 하고 있는데 또 다시 6시로 바꾸겠다고 통보가 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하고 속으로만 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한 남색 노동당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수십 명이 나타났다. 고압적이고 무표정한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동평양대극장에 검색대가 설치됐다. 무뚝뚝한 우리의 수행원들도 진한 노동당 유니폼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됐다. 중계차와 공연장을 왔다갔다해야하는 연출자인 박석원 PD와 나는 매번 검색대를 통과해야했다.

녹화 십 분 전. 공연장에 관객은 다 들어와 있었다. 1,500명의 관람객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와야 시작된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중계차에 앉아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김정은 위원장이 나타났다. 모두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참을 치고 나서야 공연은 시작됐다.

최고의 가수들은 낯선 곳에서 신인인 양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했다. 북측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푸는 느낌이었다. 첫 가수인 정인 때는 무표정. 중반인 YB의 순서에는 엷은 미소. 후반부인 이선희와 조용필 공연에는 환한 미소와 커다란 박수를 보내주었다. 마지막 피날레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 할 때는 ‘그’가 나타났을 때에 버금가는 리액션을 보내줬다.

이때 객석 조명이 다시 밝아지더니 또다시 ‘그’가 일어섰다. 수고했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그 모습을 얼른 카메라에 담았다. 훌륭한 녹화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잘 끝났다. 중계차에서 ‘수고하셨습니다’를 연신 외치고 있는데, 조선중앙방송 중계부장인 허 선생이 우리에게 왔다. 중계차 문은 수행원들이 이미 막고 있었다.

“연출가 선생. 6번하고 메인 테이프 좀 보자요.” 6번은 김정은 위원장이 담긴 카메라였다. 허 선생은 삼십분 동안 테이프를 모두 돌려보며 꼼꼼히 확인했다. 

“흔들린 화면, 인물이 어둡게 나온 화면, 포커스가 나간 화면. 그리고 이 화면! 또 이 화면!! 또또 이 화면!!! 쓰시면 절대 안되오. 무엇보다 ‘존엄’하고 ‘지대’하게 모셔야 합니다!“

옆에서 허 선생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북측 청년이 일갈한다. “아예 여기서 다 확실히 지우시라요!” 아마도 ‘그’에 관해서는 위아래가 없는 것 같았다.

허선생은 그로부터 삼십분 동안 지적한 화면을 손수 지웠다. 녹화시간부터 지금까지 세 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간 우리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모두 확실히 지운 걸 몇 사람이 확인하고서야 우리는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북측 사람들에게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존재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두 번의 평양방문으로 얻은 바로는 북한 사람들은 ‘백두혈통만 폄하하지 않으면 한없이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매서운 눈빛으로 돌변한다. 그 방면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안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주춧돌

녹화를 마치고도 세 시간을 더 있어야 했다. 모든 팀이 함께 숙소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공연이 끝나자 긴장이 풀어져서였을까. 문득 나를 전담마크(?)했던 김 선생과 친해지고 싶었다.

“김 선생님은 아이가 어떻게 되세요?”

“마침 오늘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시오(북한은 입학식이 4월1일이다)”

“입학식에 못 가셔서 속상하시겠어요.”

“일 없시오. 이 모든 게 우리 민족을 위한 거 아닙니까! 명진 선생은 아이가 어케 되시오?”

“저도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아 글쿠만요. 우리가 오늘 말입네다. 민족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시요. 우리 때는 어케될지 몰라도 말입네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좀 더 평화로운 조선을 물러줘야 하지 않캈시오.”

아... 맞는 말이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해 남과 북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거였구나. 평화로운 한반도에 정말 티끌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 이 힘든 상황을 모두들 견뎌냈구나. 김 선생의 ‘주춧돌’이라는 말 중에 우리의 보람이 있었다.

평화로운 한반도여. 전쟁의 위험이 없는 한반도여. 어서 빨리 오거라. 우리 아이들은 막연한 불안 속에서 살지 않기를. 더 나아가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평양역을 지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기를. 그래서 후대는 섬나라 같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세계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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