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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누나’, 성차별적 현실을 바꾸는 주문

‘윤탬버린’ 윤진아가 자존감을 회복한 서준희의 한마디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l승인2018.04.20 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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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JTBC

[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안판석 PD는 역시 베테랑이다. <하얀거탑>의 메스를 든 것처럼 정밀하게 묘사된 장면들보다도, <밀회>나 <풍문으로 들었소>의 날 선 풍자가 담겨진 장면들보다도, 평범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달달하게 다가오는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장면에서 안판석 PD의 진면목이 느껴진다.

진짜 고수는 힘을 쓸 때보다 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멜로 장면들이 그렇다. 윤진아(손예진)와 서준희(정해인)가 보여주는 멜로 장면이 마치 내가 하는 연애처럼 설렘이 가득해지는 건, 안판석 감독이 치밀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엮어놓은 장면들의 병치 때문이다.

윤진아가 살아가는 일상과 치열한 현실들이 안판석 감독 특유의 디테일한 연출로 촘촘하게 그려지는 건 퇴근 후 이어지는 멜로의 달콤함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다. 힘겨운 직장생활에서 퇴근 후 한 잔의 시원한 맥주가 간절해지듯, 개저씨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행되는 성차별과 성희롱 심지어 성추행이 벌어지는 지옥 같은 일터의 단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윤진아를 포근히 안아주는 서준희가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예쁘다’고 말하며 그 존재의 귀함을 바라봐주고 말해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비로소 그걸 봐주고 말해주는 존재를 만났을 때의 설렘과 떨림. 그것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특이한 건 안판석 감독이 윤진아와 서준희가 만나는 장면들에 최대한 대사를 배제하고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듯 슬로우모션에 올드 팝이 흐르는 장면들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대사를 지워내고 그림들로만 채워 넣었을 때 생겨나던 효과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장면은 시청자들이 저마다 겪었던 자신들만의 사랑을 이입하게 만든다. 지금은 무뎌졌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한껏 설렜던 그 때의 감정을.

더 놀라운 건 이 달달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갈수록 사회적 의미까지를 조금씩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30대 중반 커리어우먼들의 표본처럼 보이는 윤진아를 그저 ‘나이든 누나’로 바라보며 함부로 대하는 사회와 달리, ‘예쁘다’고 말해주는 대사에 이미 들어 있지만, 이 드라마는 최근 우리 사회가 집중하고 있는 성평등 이슈를 조금씩 꺼내 보여준다.

▲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JTBC

윤진아가 처한 현실을 통해서다. 회식 자리에서 성차별과 성추행을 일삼는 상사들 때문에 여직원들은 점점 그 자리를 기피한다. ‘윤탬버린’이라고 불리며 일종의 포기 상태로 살아가던 윤진아가 서준희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이 ‘예쁘고 귀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고, 변화하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윤진아는 상사의 요구에 과거처럼 순응하지 않고 “왜 그래야 하죠?”하고 반문하기 시작한다. 그런 변화를 같은 여성으로서 바라보는 정영인(서정연) 같은 상사는 “훌륭하다”고 칭찬해준다. 그러면서 그 상사가 문득 묻는다. “너 연애하지?”

안판석 감독이 얼마나 균형 감각이 뛰어난 연출자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의욕이 가득한 신예 연출자였다면 윤진아의 이런 변화를 마치 성차별 세상과 맞서가는 인물로 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판석 감독은 그 변화가 ‘연애’와 맞닿아 있다는 걸 드러내준다. 사랑이라는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변화가 사회의 변화까지도 만들 수 있다는 걸 이 감독은 알고 있다.

미투 운동이 계속 이어지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폭로만큼 중요한 건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평등한 문화가 일상에 자리를 잡게 하는 일이다.

안판석 감독이 멜로라는 일상적 사안을 통해 그려내는 성차별의 문제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서준희의 달달함이 윤진아가 처한 씁쓸함을 이겨내는 힘이 되듯이, 우리네 현실의 씁쓸함을 이겨내는 것 역시 누군가의 작은 행동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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