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주도시' 인천 골목시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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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음 세상⑪] 참기름 짜는 소리 1

▲ 수인역 골목시장의 풍경. ⓒ안병진 PD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이부망천. 망하면 인천 산다는 저 말에 인천시민으로서 나는 분하지도 화나지도 않다. 그동안 내가 겪은 ‘지역 폄훼’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중앙중심적이고 우월적인 사고방식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단순명료하게 표현해낸 것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경인지역 시민 1천 6백만을 한방에 훅 보내는 망할 표현 능력. 정작 폭망한 것은 자기 자신과 그가 속한 정당이면서 말이다.

서울중심주의, 중앙권력적인 사고방식은 그동안 내가 겪은 많은 이들에게 있었다. 서울로 통학하던 학창시절부터 회사를 통근하던 때까지도 말이다. 부천까지, 인천까지 가서 사는 것은 ‘밀려나는’ 것이라는 인식. 대출을 몇 억원이나 받고, 월세를 몇 백만원을 내도 서울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 내가 아니라 아이들 교육을 위해 그건 안 된다는 친구들이 여전히 내 주위에도 많다.

그게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서울에 있는 방송사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내 지난 모습을 돌이켜보면 그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서울이 아닌 인천으로,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방송사로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어디서든 라디오 방송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도 방송을 할 수 있듯, 아이들 교육도 어디서나 가능하다. 아이들은 아는데 정작 부모들은 모른다. 중심에서 이탈하면 큰일 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망한 이들이 아니라면 인천엔 누가 살고 있을까. 인천은 오래된 이주 도시다. 개항 이후 물자와 공장이 많았던 항구 공업도시로 성장하며 인천에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서해 뱃길을 따라 이주해온 충청도와 전라도 출신 사람들,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워 실향민도 많다.

여기에 차이나타운의 화교와 1990년대 불어난 해외 이주노동자까지 더하면 과연 인천은 ‘이주 도시’라 할만하다. 망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곳에 노동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 참기름 짜는 소리를 녹음하고 있는 모습. ⓒ안병진 PD

얼마 전 ‘참기름 짜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옛 수인역이 있던 곡물시장을 찾았다. 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수인역(1955년 남인천역으로 개명)이 사라진 지가 40년이 넘었으니, 인천에서 오래 산 이들이나 알고 있는 지명이다.

어르신들이 통칭하는 ‘수인역 기름집’이란 말이 더 익숙한 이곳은 인천 중구 신흥동 사거리에 있다. 연안부두에서 동인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갑자기 어디선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데, 이곳이 수인곡물시장이다.

한때는 80여개의 곡물 가게가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골목 안으로 30여개의 점포만 남았다. ‘예전엔 모두 거기 가서 고추 빻고, 기름 짰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말로만 들었지, 아직까지 시장이란 이름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도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옛 기억이 있기에 이곳에서 아직 기름을 짜고, 고추를 빻는다. 잡곡도 아직 가격이 괜찮아 장사가 된다. 성남 모란시장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격 경쟁력이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처럼 시장 풍경도 변함이 없다. 충남상회, 개풍상회, 연백상회, 개성참기름, 만수기름집, 수인상회 등. 자신의 출신지를 잊지 못해 가게 이름으로나마 걸어 놓았다. 대부분 60년이 넘은 가게들이다. 유독 이북 지명을 단 가게들이 눈에 띈다. 장사에 도가 텄던 이북 출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인상회에 들어가 보았다. 여든을 넘긴 어르신 부부가 아직 장사를 한단다. 듣던 대로 노인 부부가 카운터에 그림처럼 곱게 앉아 계셨다. 곡물시장 맞은편 모퉁이에 크게 자리한 이 가게는 원래 시장 안에 있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하자면 ‘기준이 잡혀’ 건물을 사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할머니: “저기 역전이 있었어요. 조그만 기차가 다니고 할 때. 야목, 고잔, 반월 그런 데서 조개 같은 거 잡아오고, 농사지은 거 다 가져와서 팔고…. 다 팔면 또 기차타고 가고. 조개, 돼지, 닭, 강아지 같은 것도 가져다가 팔고. 그러면 오후 2시 쯤 되면 시내에서 사람들이 장보러 나와. 그때는 사람이 우글우글 했었지.”

할머니가 말하는 조그만 기차는 사라진 수인선 협궤열차다. 궤도가 일반 열차에 반밖에 안 되는 두량짜리 꼬마 기차. 70년대 대중교통의 발달로 이곳 수인역이 1973년 사라지기 시작하며, 1995년 열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협궤열차는 수원과 인천을 오가며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 지금은 사라진 수인역 인근 기차 선로.ⓒ안병진 PD

“그때가 언제였어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수인역이 있었을 때…. 내가 지금 여든여섯이니까. 그때가 아마….”

할머니: “아니 내가 시집오니까 당신이 서른둘이야. 그때서부터 이날까지 여기 마당에서 했잖아. 스물여섯에 내가 시집오니까 그때 장마당에서 크게 장사했잖아. 당신이. 그러니까 저기 여기 합해서 58년쯤 했나.”

할아버지: “그때가 아마 한 1940년 조금 지난 해였나.”

할머니: “당신 고향이 어디였지? 아, 평북 용천. 그러니까 이 양반이 내려와서 논산 훈련소에 콩나물도 납품하고 그랬대. 나 시집오니까 장사가 잘 됐어. 호호호. 나는 성공해서 기준 잽힌 집으로 시집 온 거지. 이 양반이 생활력이 강한 덕으로, 처자식도 고생 안 시키고 여태 걱정 없이 살았잖아.”

할머니: “그때 저기 수인역 자리가 장사가 잘 됐어. 지금도 기차가 다니면 잘 될 거 같아. 수원서부터 농사짓는 사람들이 잡곡 가져오면 여기 시내 사람들이 재밌게 사가고 그랬거든. 조개도 생선도.”

이때부터 할머니의 독무대가 이어졌다. 재밌게 말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외도까지 보따리를 풀어 놓으며 할머니는 깔깔 웃으신다. 당사자가 그렇게 재밌게 이야기하니 같이 웃을 수밖에 없다.

글이 길어져 다음 편에 이야기를 연재할 수밖에 없겠다. 참기름 짜는 소리 이야기를 하려다 서두가 길어졌다. ‘타다닥’ 참깨 볶는 소리가 다르고 ‘토도독’ 귀리 볶는 소리가 다르다. 참기름이 비싸다고 더 소중하고, 다른 것은 덜 소중하다고 할 수 없다. 단순한 이치를 우리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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