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앞에선 이념도 갈등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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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스페셜-옥류관 서울 1호점' 제작 후기

▲ < MBC스페셜 > '옥류관 서울 1호점' 팝업 스토어에서 선보인 통일냉면과 평화냉면(왼쪽부터) ⓒ MBC

[PD저널=김보람 MBC PD]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평양냉면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걸레 빤 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느낌이랄까. 첫인상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던 지난 4월 초, 동행의 손에 이끌려 여의도의 한 냉면집을 찾았다. 평일 늦은 시간에 줄이 길었다. 한여름 냉면철도 아닌데 도대체 왜? 궁금해 하던 차에 옆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평양을 방문한 남측 공연단의 환영 만찬, 바로 옥류관 냉면 얘기였다. "북한에는 관심 없지만 옥류관 냉면은 먹어보고 싶다"는 말들이 흥미로웠다. 도대체 옥류관이 뭐길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미정상회담까지, 한반도 해빙 분위기를 다루는 방송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냉전, 색깔론...남북관계와 관련된 키워드들을 살폈다. 너무 어렵고 무거웠다.

그렇다면 '냉면'은 어떨까. 남과 북이 모두 사랑하는 음식이자 한민족의 소울 푸드. 냉면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력을 발휘해 서울에 '옥류관'을 만들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메인 작가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옥류관 서울1호점'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기획 단계에서만 해도 냉면이 이렇게까지 상징적인 음식이 될 줄은 몰랐다. 2018년 4월 27일, 옥류관 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의 진정한 신스틸러였다. 군사분계선을 건너 배달된 최초의 음식. 입맛이 통했다. 남북 두 정상의 '평냉 먹방'을 보며 사람들은 너도나도 냉면집을 찾아 평화의 행렬에 동참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옥류관 서울점을 만들어달라는 글이 잇따랐다. 화해의 시대, 냉면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사실 몇 년 전부터 평양냉면은 소위 '힙한' 음식이었다. 음식 좀 먹을 줄 안다는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냉면을 찬양해 왔다. '면스플레인(면+explain, 냉면에 대해 가르치려 드는 자세)'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가위로 면을 자르면 안 된다, 식초·겨자는 금물이다 등등. 그 가운데 등장한 옥류관 냉면의 현재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거무튀튀한 면발에 식초와 겨자, 양념장을 잔뜩 끼얹은 평양냉면이라니. 낯설었다.

PD 선배들은 과거 수차례 평양을 취재했던 기억을 들려주곤 했다. 옥류관에 대한 맛깔 나는 회고담을 들을 때마다 입맛만 다셨다. 호시절의 이야기였다. 남과 북의 '잃어버린 10년'은 길었다. 살벌한 대치국면을 거치면서 냉면의 추억은 희미해졌다.

오래 못 본 사이에 옥류관 냉면도 달라졌다. 일본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박영이 감독 덕분에 최신 옥류관 내부 영상을 구할 수 있었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니 2000년대 초반 옥류관 냉면과 현재 모습은 많이 달랐다. 면발도 검어지고 육수 색도 진해졌다. 맛도 조금 더 화려해졌다 들었다.

▲ < MBC스페셜 > '옥류관 서울 1호점'의 김보람 PD, 임정식 셰프, 김재영 PD(왼쪽부터) ⓒ MBC

단절의 세월동안, 어떤 이들에게 냉면은 그리움의 맛이었다. 전국 곳곳의 냉면집들을 취재하면서 많은 실향민 어르신들을 만났다. 추운 겨울 이불 속에서 덜덜 떨면서 먹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 가족과 나눠 먹던, 냉면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본 고베에는 1930년대에 창업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이 있다. 평양이 고향인 선친의 전통을 이어 4대째 매일 김치를 담그고 손 반죽으로 면을 만든다. 이들에게 냉면은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의 무엇일 것이다.

방송을 준비하면서 삼시 세끼 냉면만 먹기도 했다. 알고 먹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참 많은 냉면과 사람들을 만났다. 기꺼이 소중한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가장 마음에 남는 한 그릇은 대전 숯골에서 맛본 꿩냉면이다. 한국 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난 평양고보 엘리트 청년은 먹고 살기 위해 냉면집을 차렸다. 부모님의 맛을 그리워하며 평생 주방을 지켰다.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를 살아내며 빚어낸 귀한 맛이다. 끝내 고향, 평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작고하신 故 박근성 할아버님의 평화로운 영면을 빈다.

음식은 힘이 세다. 함께 먹는 한 그릇 음식으로 백 마디 말만큼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2018년 4월 27일의 역사적 만남이 증언했다.

방송에 세세히 담지 못했지만, 남대문시장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냉면집이 있다. 벽면 가득 붙어있는 사인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노회찬 의원과 나경원 의원의 사인도 나란히 붙어있다. 같은 지역구에서 대결을 펼치기도 했던 과거의 라이벌이다. 한 명은 가위로 면을 꼭 잘라먹고, 한 명은 가위를 절대 쓰지 않는다. 그러나 두 정치인 모두 빈대떡을 반드시 곁들여 먹는, 냉면을 무척 사랑하는 이들이다. 냉면 앞에서는 이념도 갈등도 없다. 아, 먹는 방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평양냉면, 그리고 옥류관에 대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옥류관 서울1호점' 일일 팝업 스토어를 차리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마무리됐다. 

쉽지 않은 작업에 동참해준 임정식 셰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함께 연출하면서 늘 더 깊이 고민하고 더 많이 발로 뛴 김재영 선배 덕분에 2부작 방송을 꾸릴 수 있었다. 평양에 아직 가보지 못한 제작진과 셰프가 함께 만든 '옥류관 서울 1호점'은 남북관계의 희망찬 미래에 대한 은유이자 꿈으로 봐주셨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5만 원"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평양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진짜' 옥류관 서울 1호점을 만날 날이 멀지 않으리라 믿는다. 2018년, 이제 냉면은 평화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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