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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글쓰기를 시작했다 ①]

▲ ⓒ픽사베이

[PD저널=김민태 EBS PD] 이따금 사무실에 적막이 찾아올 때가 있다. 11월, 그 날 오후도 그랬다. 바람과 햇살 그리고 피로감이 절묘하게 어울리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수면의 신이 오신 거다.

초점을 잃기 직전, 책상 위에서 뒹굴고 있는 하얀 이면지가 눈에 들어왔다. 상태 양호한 놈을 잡아 떠오르는 단어를 끼적였다. 마치 초등학교 때 글씨 연습을 하듯 또박또박.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용한 투쟁이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한 문장이 걸려들었다.

10대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수능에 매달린다

대입 시즌의 영향이었을까? 이유를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다음 문장은 운율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20대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첫 번째 문장이 시대에 대한 관조였다면 두 번째 문장은 나의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아홉. 다음은 뭐라고 쓸까? ‘정작’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정작, 30대가 되면 다시 원점에서 꿈을 고민한다

멀뚱하게 쳐다보다 기가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 년 인생을 단 세 줄로 정리하다니. 그것도 시종일관 우울한 톤으로. 더 이상 써 내려가진 않았지만 머릿속에선 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숨어 있던 또 다른 내가 말을 걸어 왔다. “인생에서 어떤 시기만 지나면 평온해질 거란 믿음은 허위야.” “인생이 그렇게 단순한 줄 알아?” “그러니 그만 준비하라고.”

되살아나는 과거 

직장 생활 십년을 앞두고 나는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하는 선배가 되었다. “전문성이 최고다. 어중간한 경험 하지 말고 회사에서 미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매진하는 게 낫겠다.” 진실된 마음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조언이었다. 지금도 그 후배를 만나면 가끔 뻘쭘하다. ‘제발 기억에서 삭제해 주기를…’

경쟁이 목적이 돼버린 삶에 익숙해지면 그 외의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지간한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문학책을 아예 읽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이 없어서다. 업무 밖에 있는 사람과는 어지간해서는 약속을 잡지 않았다. 한 동안 동창들이 모이는 자리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이따금 나를 괴롭히는 적성에 대한 고민은 오래 끌지 않았다. 잘하는 게 곧 적성 아닌가? 나는 야근 왕이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만큼 보상이 따를 거라 확신했다.

이런 삶에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과에서 오는 기쁨은 아무리 커도 유효 기간이 있다. 게다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 대게의 시간은 머리 흐림, 몸 지침.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놓고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수두룩하다. 뉴스를 보니 구직난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만 하면 된 것 아닌가?’ ‘행복이 어렵다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은 것도 괜찮은 것 아닌가?’

마흔, 글쓰기를 시작하다

서른아홉. 자기 합리화에 한계가 온 시점이었다. 우연찮은 낙서, 특히 세 번째 문장. ‘정작 30대가 되면 다시 원점에서 꿈을 고민한다.’ 이 말은 누적된 의심을 무너뜨리는 트리거였다. 오랫동안 나를 감싸왔던 허위와 불안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문장으로 드러내니 더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사십대, 오십대가 되어서도 지금처럼 ‘어쩔 수 없다’고 맥없이 답할 건가? 그렇게 죽어갈 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은 스티브 잡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당시 암 투병 중이었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당신의 삶을 낭비하지 말라” 이 말은 나의 가슴을 관통했다.

준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적어도 탄생 이후의 삶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음속에 새로운 좌우명을 새겼다. 인생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을 담보로 미래를 쫓아가지 말자. 경쟁력이라는 덫에서 벗어나자.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자. 비록 덜 인정받아도 더 끌리는 일을 선택하자. 그것이 후회 없는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새로운 욕구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넉 달간 쉼 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마흔,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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