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PD의 선곡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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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의 선곡 능력
'선별력과 감각', 말하기는 쉽지만... 20년차 접어드니 어렴풋이 알것 같아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8.09.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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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CBS 김현주의 행복한 동행> 연출)]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짝 뒤돌아보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옷 잘 입는 사람들이다. 옷이 많거나 고가의 브랜드여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 줄 아는 이들이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저런 옷들로 어쩜 저리 밋밋할까...” 하나하나 보면 다 괜찮은 옷인데, 도무지 에지가 안 난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스타일이다. 컬러나 디자인, 무늬 등을 적절히 매칭해 시선을 빼앗는 능력. 수치화할 수 없는 그 조합 능력이 옷 잘 입는 사람들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음악 선곡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옷 잘 입는 사람들의 감각을 떠올린다. 감각은 언어화하기 어렵다. 그러니 상세한 매뉴얼이 없다. 선곡은 말 그대로 그런 감각에 의지해 곡을 선택하는 일이다. 음악을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제작된 음악을 고르는 일이다. 위아래 옷을 고르고 거기다 모자와 벨트 신발까지 고려해 전체적인 룩을 완성하는 것처럼, 음악 선택도 마찬가지다. 균형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을 풍겨야 한다.

앞의 곡과 뒤의 곡의 어울림을 가늠하고 그 어울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배치해야 한다. 또한 멘트와 광고 등으로 분절된 마디 앞뒤로는 적게는 2곡 많게는 4~5곡까지 이어지므로, 장르와 보이스, 리드 악기와 곡의 템포 등을 계산해 거슬리지 않는 다채로움을 띠게 해야 한다.

옷을 보는 시선이 순간적인 흐름이듯이 선곡 역시 감흥이 잘 흐를 수 있도록 수로(水路)를 놓는 일이다. 높낮이와 커브를 동반한 곡선이면서도 마찰이나 충돌 없이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옷을 잘 입는 것처럼. 예컨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곡들만 모아서 주크박스인 양 틀어대면 좋은 선곡인가? 아니다. 듣는 이가 쉬이 지친다. 그렇다고 “이 곡 아시나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젠체하는 태도와 낯섦으로 청취자들에게 외면 받기 십상이다.

편안하되 뻔하지 않게 감정의 흐름을 엮어가는 능력, 그건 마치 옷장에 있는 몇 벌 안 되는 옷으로도 자신의 취향을 표출하면서 저항감 없이 다른 이의 호감을 얻어내는 능력과 닮아 있다.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감각 말이다. 사실 이런 능력은 마냥 열심히 한다고 길러지지 않는 것 같다. 음악 사운드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연과 멘트에 적절하게 부응할 만한 곡의 목록이 자신 안에 충분히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 제작이 천을 재단하고 봉제해 옷을 만드는 일에 속한다면, 음악 프로는 앞서 말했듯 만들어진 옷들을 매칭해 방송시간 전체의 룩을 완성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사교양이 메이킹의 영역이라면 음악은 초이스의 영역이랄까.

앞에 것이 구성력과 근성을 요구한다면, 뒤에 것은 선별력과 감각을 필요로 한다.야구선수가 팔 근육을 많이 쓴다면, 축구선수는 다리 근육이 그럴 것이다. 각기 발달되는 근육의 위치가 다를 뿐, 거기엔 서열이 아닌 선호가 있다. 다만 자신이 좀 더 키워나가야 할 근육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20여년 차 가까이 되어가니 그걸 조금은 알 것 같다. 방향감은 오는데 속도감은 아직이다. 갈 길은 알겠는데 발걸음은 무겁다. 그래도 듣는 이에게 ‘2시간’을 ‘20분’으로 만드는 상대성 이론의 실제를 선곡을 통해 확인시키기 위해 오늘도 무겁지만 더딘 발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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