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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열차는 오늘도 달린다

[무소음 세상 17] 화물열차 소리 안병진 경인방송 PDl승인2018.09.20 14: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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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고가 아래 차단기 ⓒ안병진 PD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호루라기 소리에 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멈춰 선다. 오전 9시. 월미도로 가는 길에 있는 만석고가 아래 횡단보도.

“댕강댕강. 댕강댕강” 차단기는 사라졌지만 녹음된 종소리가 우렁차다. 인천역에서 근무하는 나이 지긋한 인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도로를 통제한다.

매일 아침 인천항으로 석탄을 싣기 위해 화물 열차가 이곳을 지난다. 이 선로의 이름은 축항선. 축항은 부두를 뜻한다. 인천으로 수입된 유연탄과 제철 등이 이 선로를 통해 제천과 단양 등으로 수송된다.

교통 신호가 없어 복잡한 고가도로 아래가 순간 조용해졌다. 온갖 소음들로 시끄럽던 도심이 조용해지는 시간. 가끔씩 경험하는 이 순간이 나는 매번 신비롭다.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의 4차원이 열릴 것 같은 그런 순간.

인천항에서 올 줄 알았던 화물기차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모든 사물이 멈추었는데 혼자 정지화면을 찢고 나오는 화물열차. 비현실의 순간이 열린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화물열차 머리칸이 선로를 따라 홀로 지난다. 이제는 화물열차도 전동열차로 교체되어서 이런 디젤 기차를 보기도 흔치 않다. 아침 열차는 작업을 하러 항으로 들어간다. 저 기차를 잡아타고 미나가 잡혀있는 대마왕의 세상으로 타임슬립을 하려는 순간.

“아침에는 머리칸만 오니까 소리가 크지 않을 텐데. 이따 오후에는 석탄을 싣고 가니까 소리가 더 크게 나. 그때 녹음을 하지 그래?”

건널목을 지키는 아저씨가 녹음을 하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저기 있잖아. 횡단보도 가운데. 거기 철로 나사가 헐거운 데가 있는데, 거기 가면 소리가 크게 들려.”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기차가 출발한 곳이다. 인천역 광장에 그것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지금 도원역 인근이었던 제물포역과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 열차. 그 후 수많은 기차 노선이 인천항과 조병창이 있던 부평을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동양화학선, 해양북부선, 주인선 등 많은 열차 노선이 물자들을 실어 나른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도 열차가 다녔다. 인천항과 동양화학 공장을 오가던 화물열차. 그 선로 일대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철길에서 메뚜기를 잡았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기차가 언제 오나 선로에 귀를 대고 알아맞히는 내기를 했다.

멀리 기차가 오는 게 보이면 선로 위에 못이나 돌멩이를 올려놓고 그것이 일그러지는 걸 좋다고 쳐다보곤 했었다. 기차에서 아저씨들은 고함을 지르고 아이들은 도망갔다가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가 지나면 그걸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인천의 기차선로는 경인선과 축항선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그래도 비교적 최근까지 있던 주인선 노선도 2005년 수인선 복개 공사를 하며 사라졌다. 1959년 인천항을 통해 들여오던 화물 수송을 위해 경인전철 주안역과 수인선 남인천역 사이를 다니던 화물 열차. 주인선 열차는 1985년까지 하루 네 차례 오가며 주로 미군 화물을 수송했다. 주한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전·출입하는 여객열차로 이용하기도 하고 군입영자들이 남인천역에 집합해 논산훈련소로 향하는 '작별의 입영열차'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그 선로길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좁고 긴 공원이 됐다. 축항선 일대도 재개발 계획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제 도심에서 열차가 지나는 4차원 타임슬립의 순간은 다시 오진 않을 것이다.

▲ 축항선을 달리는 기차 ⓒ안병진 PD

아저씨 말씀대로 오후에 다시 녹음을 하러 갔다. 오후 3시. 꽁무니에 줄줄이 화물을 실은 열차가 다시 정지화면을 뚫고 나타난다.

“처얼컹 처얼컹.”

노쇠한 디젤 열차는 마치 지팡이라도 짚고 걷는 양 느리게 지난다. 아저씨의 말씀대로 나사가 헐거운 곳에서 소리가 크게 난다. 건널목을 건너던 사람들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나는 손으로 기적을 잡아당기는 흉내를 낸다. 기관사에게 기적을 울려달라는 신호이다. 어린 시절에도 지나던 기차에 이렇게 수신호를 보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차가 지나가면 뒤에서 따라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놀던 기찻길에는 대마왕에게 붙잡힌 미나도 버섯돌이도 없었다. 돌보는 이 없던 심심한 소년들은 그렇게 서로를 돌보며 지냈다.

“빠앙”

우렁찬 기적이 울린다. 멋지게 녹음이 됐다. 나는 기차 뒤꽁무니에 엄지를 치켜세운다. 기차가 지나고 사람들이 움직일 때까지도 제자리에 서서 기차 소리를 듣는다. 기차는 경인선 전철선로로 진입해 멀어진다. 멍하니 나는 건널목에 홀로 남아있다. 다시 차들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안병진 경인방송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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