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서울, 공존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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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서울, 공존하는 길
[비필독도서 ②] ‘서울 선언’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8.09.24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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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갓집으로 가려면 태백선을 타야 했는데, 태백선 시점인 청량리역으로 가는 1호선이 빨간색이어서 빨간색 도장이 된 기차를 탈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사진은 서울시가 서울경관기록화사업을 거쳐 공개한 1995년 청량리역 주변 모습.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PD저널=오학준 SBS PD]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조금은 한산해진 추석 전날, 친구와 지하철을 탔다. 책모임에 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을 주제로 한 책이었던지라, 자연스레 우리는 서울에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하게 됐다.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지하철 이야기를 꺼냈다. 외갓집으로 가려면 태백선을 타야 했는데, 태백선 시점인 청량리역으로 가는 1호선이 빨간색이어서 빨간색 도장이 된 기차를 탈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친구는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빨간색 노선이 있었단 말야?"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 서울에 온 친구에게 1호선은 언제나 남색이었다. 그가 머무르고 있는 신촌과 고향을 연결하는 통로인 서울역이 그에겐 한때 서울의 전부였고, 그 서울은 지하철 노선도의 색처럼 외지에서 마주하는 차가운 긴장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와 친구의 서울은 처음부터 다른 색이었다.

이처럼 서울은 하나가 아니었다. 20세기 내내 서울은 주변을 집어삼키며 그 몸집을 불렸고, 그 때마다 이질적인 풍경들은 서울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한 세기라는 시간이 지나며 그 풍경들은 서로를 거울삼아 닮아갔지만, 친구와 나의 색이 다르듯이 통일된 ‘서울 풍경’은 없었다. 단지 각자의 지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울 풍경‘들’이 있을 뿐이다.

▲ 문헌학자 김시덕이 펴낸 <서울선언>

김시덕의 <서울 선언>은 이 다양한 서울 풍경들의 틈새를 걸으며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는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는 서울의 풍경 사이를 헤집으며 이 도시가 얼마나 깊고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복합물인지를 보여준다. 마치 고고학자처럼, 저자는 서울의 지층에 녹아있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조사한다. 그리하여 깨끗하게 통일된 듯 보이는 서울의 거리들에서, 점처럼 묻어있는 이질적인 흔적들을 찾아내어 그 흔적에 ‘시민권’을 부여한다.

저자는 자신이 한때 머물렀던 서울의 다양한 공간들에서부터 시작해 서울의 주변부 단지와 상가, 골목, 공단, 유흥가 등을 걷는다.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청량리역의 낡은 간판에서 나의 서울을 떠올리듯이, 그 역시 답사한 거리를 자신만의 ‘서울’을 구성하는 중요한 재료들로 삼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서울은 매끄럽게 통합된 환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실제로 발 딛고 살았던 가난과 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구멍 난 천과 같다.

저자의 ‘서울’과 독자의 ‘서울’이 빚어내는 거리는 서울‘들’의 증거다. 저자가 서울에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풍경과, 독자인 내가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풍경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풍경과, 스무 살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라온 친구의 풍경 사이에는 또 적지 않은 시간이 놓여 있다. 친구가 나의 첫 서울 풍경에 마음 주기 어려운 것처럼, 나 역시 저자가 서울을 처음 마주하며 품은 그 마음을 쉽게 수용하기란 어렵다. 이 마음과 몸의 거리, 시간과 공간의 넓이가 다양한 서울‘들’의 재료다.

이 책을 통해 그와 함께 가상의 답사를 가는 일은 즐거웠다.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풍경들이 그 나름대로 각자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시간과 공간만이 가치 있는 시점(始點, 視點)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서울 역시 여전히 남아있는 간판, 골목, 깃발처럼 도시의 점으로 남아 있으리란 기대감도 함께 품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서울 역시 점처럼 흩어진 비석으로, 흉상으로, 바닥 장식이 되어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에 흥분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궁궐을 복원하고, 한옥 마을을 복원하는 것처럼 조선왕조와 사대부 문화를 계승하는 것만이 서울의 진짜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 한때 나도 이것이 ‘진짜 서울’을 되찾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를 위해 시도된 모든 사업들은 다른 사람들의 서울을 지워버렸다. 올림픽을 위해 사라졌던 상계동 사람들의 서울이나, 개발을 위해 밀려났던 포이동 사람들의 서울은 그 사이 어디로 갔는가. 과연 오늘을 사는 나에게 조선 왕조의 궁궐은 ‘진짜’ 서울이긴 했는가. 상도동의 골목길 어딘가에서 야근한 남편을 기다리며 밤새 나를 업고 있던 엄마의 서울은 서울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의 서울 사람들은 다양한 서울들을 공존시키는 데 여전히 서툰지도 모른다. 담 하나, 골목길를 두고 마주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다른 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찾는 일에 게을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모든 것을 뒤엎고, 새로이 건설하고, 역사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은 태생적으로 복수였고, 여전히 이질적이다. 그러니 걸으며 서울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은, 함께 사는 서울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실습인 셈이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서울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답하지 않는 듯하다. 저자에게 있어 우선권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있다. 하지만 도시는 다양한 욕망을 조화시켜야만 유지된다. 같은 공간에 누적되어 있는 서울들 중 살려야 하는 것들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니 선택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짜 서울’의 탈을 쓰고 궁궐을 복권하는 일이 문제인 것은 그 기준이 독단적이었기 때문이지 선택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책과 저자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함께 감당할 문제다. 오늘의 서울을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굴해 낸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이 부서져 내리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삼문화광장’은 훌륭한 기준의 한 사례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어떻게 정교하게 구성하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에 어떻게 대입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오늘의 서울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서울들이 공존하는 서울 풍경이란 어떤 모습인가, 독자이자 창작자인 PD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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