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39]올가을 유난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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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 날 39]올가을 유난히 반갑다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PD·수필가
  • 승인 2018.10.0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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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였던 지난 7월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인근 도로에 지열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있는 가운데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는 모습. ⓒ뉴시스

[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지난여름은, 하루하루 신기록의 연장이었다. 매스컴에서는 매일, 최고기온 극값을 기록하였으며 관측 시작 이래 가장 높은 값이라는 기사가 번갈아가며 메인 페이지를 장식했으니, 어느 날부터인가 ‘최고’, ‘폭염’ 등의 단어의 어감조차 불감증에 이를 정도였다.

기사에서는 일제히, 2018년의 더위를 지난 1994년의 그것과 비교하며 폭염일 수가 1994년을 넘어섰다고 난리였다. 기상청은 4월 시작된 올해 폭염의 합계가 2018년 8월 23일 밤 12시까지 31.3일로 집계돼 1994년의 31.1일을 밀어내고 역대 최대 폭염일 수 연도로 등극했다고 전했다. 2018년 여름 더위는 최고로 끔찍했고, 1994년의 여름보다 더 더웠다는 것이니 1994년의 여름은 또 얼마나 찜통이었을까!

하필, 1994년 한 여름 동안 나는 첫 아이를 출산하고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는 중이었다. 1994년 5월 하순에 출생한 아들을 데리고 남원 친정집에서 그 여름을 보냈으니 거대한 불가마의 입구가 열려있었던 셈이다.

그때야 사상 최대의 더위라고 해도 알 바 없고 경험한 바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 견디는 게 일상이었는데, 출산 뒤라 찬 바닥에 누워있을 수 없어서 미지근하게 불 들어오는 전기요 하나 깔고 선풍기도 멀리 한 채 부채 바람에 의지하고 있었다. 찬물로 샤워할 수 없고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빨아서 몸을 닦아내며 더위와 사투를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서 끈끈한 더위마저 무기력증을 얹어주었다. 머리맡에서는 작은 FM라디오가 하루 종일 켜져 있었는데 그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지 쓰고파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주며 
아침 햇살 눈부시게 나를 깨워 줄 그런 연인이 내게 있으면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작은 우체국앞 계단에 앉아 
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 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지 쓰고파
(마로니에 노래 <칵테일 사랑> 가사 일부)

출산의 기쁨은 잠시, 육아의 시기가 도래함과 동시에 몸은 자유롭지 못하고 마음은 부담이 짓눌려서 심신이 편치 않았다. 칵테일 사랑은 그런 내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다. 내 마음 그대로 알아주는 것 같았다. 어서 일어나서 거리도 좀 자유롭게 거닐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전시회장도 가보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지도 써보고 싶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간절하게 듣고 싶었고, 우체국 계단에 앉아 예쁜 엽서에 마음을 담고 싶었다.

그럭저럭 백일을 넘기고 남편과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는데, 첫 외출을 하려고 보니 몸에 맞는 옷이 없었다. 겨우 옷 한 벌을 구해 입고 집을 나선 것이 구례 화엄사였는지, 아무튼 주차장에서 산문에 오르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신체의 변화는 우울증을 심화시켜 유쾌하지 않은 나들이였다. 그날 친정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라디오에서 부활의 노래를 들었다.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굴러 내렸다.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넘어 거리에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 넌 서있을 것 같아
내 기억보단 오래돼버린 얘기지 널 보던 나의 그 모습
이제는 내가 널 피하려고 하나 언제가의 너처럼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 하면 할수록
멀리 떠나가도록 스치듯 시간의 흐름 속에
내 기억보단 오래돼버린 얘기지 널 보던 나의 그 모습
이제는 내가 널 피하려고 하나 언제가의 너처럼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걸 너를 사랑 하면 할수록
(부활 노래 <사랑할 수록> 가사 일부)

1994년의 여름, 그 해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를 했던 산모들이 모두 나처럼 우울증에 울렁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후 우울증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나 또한 이유 없이 우울하고 불안정하고 심리적 중압감으로 괜스레 슬퍼져서 친정엄마의 잔소리도 괜히 섭섭하고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친정어머니의 첫 손주에 대한 사랑이 여름 더위를 능가할 만큼 뜨거웠다는 것이다. 천성이 깔끔하고 부지런한 친정 엄마는 첫 손주를 얼마나 알뜰하게 거두시는지, 밤낮으로 닦고 씻기고 먹이시느라 엉덩이를 붙일 틈이 없었다.

해가 뉘엿 기울면 유모차에 모시 이불을 깔고 아이를 뉘인 다음 부채 하나 들고 마실을 다니셨다. 바람 잘 통하는 남원역 광장 한 편에 자리 잡고 부채로 모기를 쫓으며 아이를 달래주곤 했다.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를 요에 뉘이고 모시 조각을 이어서 상보를 만드시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하루하루 예쁘게 자라는 손자를 보는 것이 지상의 가장 큰 낙이 되었던 친정 엄마는 1994년 그 더위가 더욱 유난하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친정 집 살림은 변한 것이 없다. 내가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보이던 자개장롱도 그대로 이고, 큰 애가 오줌 싸고 똥 싸던 아랫목도 그대로이다. 그러나 오다가다 아이 손잡고 눈 맞춰주시던 외할머니는 둘째 손자가 태어나던 1998년에 돌아가셨고, 펄펄 날아다니시던 친정 엄마는 어느덧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 여름을 훌쩍 넘기고 맞이한 10월이라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더 반갑고 고맙다.ⓒ픽사베이

돌아보니 25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아득하다. 지난여름에는, 365일 내내 찜통더위로 숨 막힐 것 같더니만 8월에서 9월로, 9월에서 10월로 달력을 넘기는 동안 기온 차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아, 덥다고 난리 치던 게 불과 두 달 전인데, 25년 전의 여름은 기억에도 없다. 그래, 우리들의 세월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살아지는 삶이다.

역사 이래 가장 덥다는 해에 태어난 큰 아들은 25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1994년의 여름보다 더 덥다는 2018년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렇게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랄 것이다. 지난했던 무더위가 기세가 누그러질 즈음, 갑자기 마음 밑바닥에서 승리감이 몰려왔다. 폭염과 폭풍과 거센 인생의 회오리 속에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잠재운 스스로에 대한 칭찬 같은 것이다.

개선행진곡은 겨울을 넘긴 자에게만 주어지는 상인 줄 알았는데, 2018년의 여름을 꿋꿋하게 버틴 모든 것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여름을 훌쩍 넘기고 맞이한 10월이라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더 반갑고 고맙다.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살다보면 하루 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걱정 멀리 던져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우-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 
(권진원 노래 <살다보면> 가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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