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치기' '기습키스' 로맨스 가장한 드라마 속 폭력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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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치기' '기습키스' 로맨스 가장한 드라마 속 폭력 여전
한국여성민우회 드라마 120편 모니터 해보니... '강제 신체 접촉 빈번' '배경음악 삽입해 낭만적 요소 부각'
  • 이미나 기자
  • 승인 2018.10.17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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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16일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PD저널=이미나 기자] 찰과상을 입은 여성을 향해 "누가 마음대로 다치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남성, 급한 상황에서 운전을 한 여성을 향해 "위험한데 왜 운전을 했느냐,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고 말하는 남성, 자신의 방에서 나가라는 여성에게 "사실은 너도 원하잖아"라며 강제로 입맞춤을 시도하는 남성….

모두 최근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속 인물들이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이하 민우회)는 16일 최근 방영한 드라마들에서 여전히 '벽치기' '손목잡기' '기습키스' 등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이 재현되고 있다는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일상에선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행위가 드라마 속에서는 애정표현으로 그려지고, 기습적 스킨십 등이 '남성성'으로 부각되면서 여성 등장인물의 수동성과 비주체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민우회 모니터링은 2017년 7월부터 2018년 6월 사이 총 지상파와 JTBC, tvN 등 9개 방송사에서 방영된 120개의 드라마(총 2946편)를 대상으로 했다. 그 결과 625건의 문제 장면이 발견됐다.

이를 유형별로 분석해 보면 손목을 잡아끌거나 낚아채고, 포옹이나 키스를 하는 등의 '강제적 신체 접촉'이 425건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옷이나 행동 등을 통제하는 경우(104건), 스토킹(62건), 언어폭력(56건) 등도 다수 찾아볼 수 있었다. 드물지만 강제로 차에 태워 운전하거나 납치하는 경우(14건)나 물건을 부수는 경우(8건)도 존재했다.

이 같은 문제들이 발견된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로맨스'인 경우가 282건(45.12%)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이른바 '썸'이라 불리는 준 로맨스 관계(197건, 31.52%)와 짝사랑 관계(146건 23.36%)가 뒤를 이었다.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와 연령 등을 분석한 결과, 남성 등장인물이 사회적 지위나 연령 모두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는 남성이 우위에 있는 경우가 304건(48.64%)이었지만, 여성이 우위인 경우는 37건(5.92%)에 불과했다. 연령 면에서도 남성이 우위인 경우가 300건(48%)으로 여성이 우위인 경우인 60건(9.6%)보다 다섯 배 많았다.

여성 등장인물이 위계나 연령에서 우위일 때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이 일어나는 경우는 각각 44건(5.95%)과 69건(9.33%)에 불과했지만, 남성 등장인물의 경우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이 일어나는 횟수가 362건(48.98%), 359건(48.57%)로 집계됐다.

문제는 이러한 장면들이 배경음악이나 슬로우모션, 클로즈업 등 연출 효과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 결과 장면 속 상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402건(64.32%)으로 나타났으며, 긍정적 묘사를 위해 동원된 수단은 배경음악 사용(371건)이 가장 빈번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우회는 "(장면 속 상황의) 폭력성을 삭제하고 낭만적 요소만을 부각하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16일 드라마 모니터링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 PD저널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창작자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번 모니터링 결과는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온 재현의 관습에 관한 데이터"라며 "관습적으로 연출하는 장면들이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안 된다'고 명확히 말하는 것이 창작자들이 다른 상상을 하는 데 도움을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드라마 제작 현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소연 KBS 드라마 PD는 "어려움을 겪으며 인물이 자각하고 변화하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이고, 동일한 상황이라도 연출자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함께 논의해야 할 것 같다"면서도 "작가든 연출자든 짧은 시간에 많은 장면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클리셰를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 PD는 "드라마는 대중적 장르인 만큼 새로운 여성 서사가 인기를 끌 수 있다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적극적인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 현상을 지적해 온 최지은 작가는 "드라마는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콘텐츠인 만큼 드라마에서라도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특히 공영방송은 사회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콘텐츠를) 이끌어가야할 책임이 있다"며 "대중이 문제가 있는 드라마를 보이콧, 비판하고 좋은 콘텐츠에 대한 '영업'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변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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