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최고의 평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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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최고의 평등주의자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구름감상협회', 선언문에 담긴 삶의 여유와 진지한 태도
  • 하정민 MBC PD
  • 승인 2018.10.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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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하정민 MBC PD] MBC <굿모닝FM> 진행자인 김제동 씨, 청취자가 붙여준 애칭으로 부르면, '동디'와 초창기에는 책 얘기를 참 많이도 했다. 서먹한 시절에 취향을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 다독가인 동디에게 좋은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이런 대화가 뚝 끊어졌다)

동디가 추천해준 책 중에는 어린이들의 엉뚱한 질문에 각 분야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는 내용의 책도 있었다. 그 중 비와 관련한 질문의 답변자가 무척 눈길을 끌었다. 직함이 무려 '구름 감상 협회' 설립자.

이름만 들어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기분이 좋아지는 구름 감상 협회. 뭐하는 곳인가 찾아보니 이름 그대로 정말 구름을 감상하는 모임이다. 설립자인 영국인 개빈 프레터피니 씨는 온갖 형태의 구름을 감상하길 좋아해 2004년 이 협회를 설립하고 전세계 회원들이 찍어 보낸 구름 사진을 웹사이트를 통해 나누고 있다.

회비도 걷고 배지도 있는 어엿한 협회라, 근사한 협회 선언문도 있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구름이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으며 구름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한없이 초라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쓸모란 게 상대적일 순 있겠으나, 세간의 상식으론 영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진지하게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긴장이 풀린다. 빽빽한 일상에 숨구멍을 발견한 것만 같다. 협회의 존재를 알게 된 뒤 난감한 순간이 올 때면 구름 감상 협회를 떠올리며 구름을 올려다 봤다. 꽤 도움이 됐다.

▲ 구름감상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기획한 대로 일이 풀려가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할 때, 구름 감상 협회를 떠올린다. 개빈 프레터피니 씨는 사실 협회를 '얼떨결에' 만들었다고 한다. 구름과 관련한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는 장난스레 자신이 '구름 감상 협회'의 설립자라고 소개했다. 강연이 끝나고 모여든 사람들이 가입 방법을 물었고 자연스레 진짜 협회가 조직됐다. 그리곤 조직 1년 만에 25개국, 2천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게 됐다.

기획대로만 굴러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된다. 열심히 하다보면 어떤 건 사그라들고 어떤 건 터진다. 나머지는 청취자의 몫이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히 갖고 있을 것.

미묘한 일로 기분이 상했을 때, 구름 감상 협회를 떠올린다. 어쩐지 사람들에게 ‘남자는 PD, 여자는 작가’라는 도식이 있나보다. 아무리 PD라고 소개해도 이어지는 말은 “작가님, 그래서요…”다.

얼마 전엔 외부 사람들과 회의를 했는데 그렇게 PD스러운 역할(?)로 한참을 떠들었는데도 다음 날 동석한 남자들에게만 PD, 나에겐 작가라고 굳이 직함을 붙인 메일이 왔다. 남자 선배들이 고맙게도 항의해주었지만, 말리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뭐 작가나 PD나 방송사 동료니까 바깥에서 어떻게 부르든 상관은 없지만… 어쩐지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에, 나는 기린인데 자꾸 얼룩말로 불리는 것 같아 미묘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럴 때 구름 감상 협회의 선언문 두 번째 문장을 읽어본다. “우리는 구름이야말로 대자연의 시이며 최고의 평등주의자라 생각한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름은 스스로 암수 구분도 없다. 각자 개성대로 생김새를 존중받고 자유롭게 떠다닌다. 이런 생각의 비약만으로도 조금은 기분이 풀린다.

그렇다고 구름 감상 협회가 허허실실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이런 비장한 선언도 한다. “우리는 '파란 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 매일 구름 하나 없는 단조로운 하늘만 올려다봐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도 지루해질 것이다.” 제 아무리 한가로워 보이는 취미라도 배제와 억압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그럼, 각을 세울 땐 세워야지. 잘한다 구름 감상 협회.

그렇게 나는 요즘 힘들 때마다 하늘을 들여다보며 구름 감상 협회를 생각한다.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삶의 여유, 그 여유를 정당화하는 귀여운 논리와 진지한 태도를 되새겨보면서. 그런 것들이 어쩌면 삶을 조금은 윤택하게 해주는 건 아닐까. ‘파란 하늘주의자’의 입장은 다음에 들어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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