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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음 세상 19] 인천 차이나타운 쌍십절의 소리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인천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다. 오랜 인천 사람들은 하인천이라 부르는 1호선 지하철의 종점, 인천역에서 내리면 마주보이는 언덕 위 마을. 지금이야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지만, 예전 중국인 마을은 어둡고 스산한 곳이었다.

좁은 골목에 향신료 냄새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한데 뒤엉켜 자장면보다 더 거무튀튀한 음침함을 내뿜던 곳. 자유공원과 신포동의 울퉁불퉁한 근육질 같은 골목에서 놀던 형들도 발길을 함부로 들일 수 없었던 그 곳.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니 학교도 있고 집도 절도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 부끄럽게도 그동안 나는 오로지 자장면과 요리만 찾아 다녔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이 땅에 자리를 잡은 화교(華僑)들은 온갖 차별과 경제적 탄압으로 자장면 집을 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과거 화교들은 대부분 자장면 집을 하거나 중국집을 하거나 요릿집을 했는데 특별한 경우 만두집을 할 정도였다.

검은 춘장으로 덮어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장면처럼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화교는 중국인들 특유의 생활력과 자존심으로 세상 어느 곳보다 차별이 심했던 이 땅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들의 문화를 공식적으로 엿볼 수 있는 날이 10월 10일 쌍십절, 즉 중화민국의 건국일이다.

10월 10일 10시. 인천화교중산학교(仁川華僑中山學校)를 찾았다. 중산학교가 생기기 전 이곳은 청국영사관, 일명 청관(淸館)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영사관의 부속건물이던 회의청(會議廳) 건물만 학교 옆에 남아있다. 지금은 인천화교협회 건물로 쓰이고 있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하기 전에 지은 것이니,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구 청국영사관 회의청. ⓒ안병진 PD

나는 이곳에서 들었던 ‘소리’를 잊지 못한다. 어느 여름, 그날도 만두집에서 낮술을 먹고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화장실을 찾게 되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급하게 뛰어 들어간 곳이 이곳 화교협회였다.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이곳이 학교 곁임을 알아 차렸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소리. 고저장단. 선생님을 따라 중국어로 글 읽는 소리였다. 생소한 곳에서 들리는 뜻밖의 소리는 환청과 같았다. 낮술로 취기까지 있던 상태라 그 소리는 더 비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을 기웃거렸다.

고즈넉한 중정 마당을 중심으로 오랜 중국풍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곳, 회의청이었다. 유치한 장식의 차이나타운 건물만 보다가 이곳을 보니 ‘여기가 진짜구나!’ 그 속을 들여다 본 느낌이 들었다. 학생들은 이 건물 한 편에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받고 있었다. 마침 학교종이 울리고 불청객인 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외국인학교로 등록된 중산학교는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교과과정이 있다. 학생들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문 앞에서 밝게 인사를 건넨다. 학교 운동장에는 대만의 국기, 청천백일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화교 학교는 대만 정부의 교과과정을 따른다. 인천의 화교들은 대부분 대만 국적이지만 요즘에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나 조선족의 자녀들도 이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기다리던 학생들의 축하 무대가 이어진다. 말로만 듣던 쿵푸 시범과 사자춤, 용춤을 눈앞에서 볼 참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학생 수가 많지 않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어림잡아 200명이 안 되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유치원생들 엄마로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행사는 중국어로 진행되는데, 구경 온 엄마들은 모두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예전에 화교들은 화교들끼리 결혼을 했지만 지금은 한국인과도 결혼을 많이 한다. 이제는 대만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예전 쌍십절 행사는 화교들의 큰 축제였다. ‘10월 10일은 차이나타운에서 자장면을 못 먹는 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날만큼은 화교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고 쌍십절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화교가 아닌 이들도 이 진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교를 기웃거렸다. 역동적인 사자춤과 용춤은 인천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던 구경거리였다. 이제 모두 옛일이 됐다.

▲ 지난 10일 인천화교중산학교 쌍십절 행사에서 학생들이 용춤을 추고 있는 모습. ⓒ안병진 PD

유치원생들의 장기자랑부터 시작해 여학생들의 쿵푸 부채춤과 아이돌 댄스가 이어진다. 전통춤보다 케이팝 댄스에 아이들은 더 신이 난다. 이를 이어 남학생들이 사자춤과 용춤을 춘다. 기대했던 역동적인 안무는 아니다. 그래도 열심인 아이들을 보니 기특하다. 자신의 전통과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아이들의 안간힘에 마음이 풀어진다.

그나저나 방송에선 쌍십절의 소리로 무얼 내보내야 할까. 용춤 출 때 두드리는 북소리? 부채춤 출 때 ‘촤악’하고 펴는 부채 소리? 중국어로 부르는 노랫소리? 중국어와 한국말이 짬뽕되는 소리? 아니면 학생들이 중국어로 책을 읽던 내 기억속의 그 소리를 다시 담아야 할까. 자장면을 비비며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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