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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전쟁’ ‘빅뱅이론’ 뜻밖의 공신

과장보도로 커진 '우주전쟁' 소동과 '가짜뉴스' 하정민 MBC PDl승인2018.10.29 12: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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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H.G. 웰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톰크루즈 주연의 <우주전쟁> 스틸컷.

[PD저널=하정민 MBC PD] 라디오의 힘을 얘기할 때 늘 인용되는 게 오손 웰스의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이다. 외계인의 침공을 알리는 장면이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자 청취자들이 이를 진짜로 믿고 집밖으로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다. 경찰서와 소방서에는 신고 전화가 빗발치고 도시는 대혼란을 겪었다는데, 진짜일까? 라디오 매체에서 일하면서 이 이야기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있던가?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을 읽다가 해당 매체 종사자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는 거다. 1938년 오손 웰스의 목소리로 <우주 전쟁>이 방송된 건 지역 방송사 몇 군데뿐이었고, 널리 알려진 ‘집단 패닉’ 현상은 없었다고 한다. 라디오를 성가시고 무책임한 미디어로 깎아 내리려고 신문사에서 지어낸 가짜 뉴스였다는 거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도 이 가짜 뉴스가 되레 훌륭한 마케팅 수단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건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소문을 널리 퍼뜨리면서 이 이야기는 라디오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좀 더 찾아보니 3주 동안 1만 건 이상의 관련 뉴스가 이어졌고, 신문의 과장 탓에 방송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이 희생자인 양 착각하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신문사 대 라디오, 여론전의 승리는 이 사건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오손 웰스, 그리고 라디오에게 돌아가게 된 셈이다.

누군가를 헐뜯으려다 얼떨결에 그의 인장을 만들어주는 사례는 꽤 많다.(유독 내 눈에만 그런 사례가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138억 년 전 무한히 작은 한 점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우리 우주가 탄생했다는 ‘빅뱅 이론’, 이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다.

빅뱅 이론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영국 BBC 라디오에 출연해 이 이론을 비판하면서 “그럼 우주의 모든 물질이 어느 한 순간 뻥(빅-뱅!) 하고 만들어졌다는 말이냐”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타격감 제로. 오히려 팽창 우주론의 대표주자였던 과학자 조지 가모프가 이 표현을 재밌다고 생각해 자신의 이론 이름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빅뱅 이론은 더 유명해졌다.

비슷한 일은 미술계에서도 일어났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클로드 모네의 ‘인상, 일출’이라는 작품을 두고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제대로 된 표현에 미숙해 인상의 효과만 좇는 인상주의자”라며 조롱에 가까운 혹평을 한다. 모네와 그 동료 화가들은 이 표현을 적극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시회 제목을 자랑스레 ‘인상주의자 전시회’라고 지어버린다. 그리고 인상주의는 지금까지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가 됐다.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반대하고 싫어하던 대상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헤이터(?)들의 기분은 어떨까. 이론으로 한 번 지고, 상대편에게 멋진 이름까지 선물해버렸다. 두 배로 약 오르지 않을까. 얼마나 짜증이 솟구칠까. 특히 졸지에 빅뱅 이론 작명가가 된 프레드 호일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상 우주론을 수정하지 않았다니, 빅뱅 이론이 과학계 주류에서 언급될 때마다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싶다. 정말이지 비아냥과 조롱은 함부로 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의견이 달라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험악한 조롱의 말이 떠오를 때, 주문처럼 읊조려본다. ‘우주 전쟁… 빅뱅 이론… 인상주의...’ 나의 분노가 오히려 상대편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0.00001%라도 있다면, 거두는 게 좋겠지. 한편으론 누군가의 턱없는 비난에도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여유 있게 받아치는 승자의 코스프레라도 해보는 거다. 그렇게 때때로 옹색한 순간이 올 때, 세 개의 단어를 읊조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이건 진짜다. 


하정민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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