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라디오 효과맨, 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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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라디오 효과맨, 제리
국내에선 사라져가는 라디오드라마, 삶의 경험을 녹인 생생한 효과음
  • 김승월 전 MBC PD‧인하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 승인 2018.11.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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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라디오 MBC DZRH 채널의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김승월

[PD저널=김승월 전 MBC PD/인하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쿵’ 소리에 바닥이 울렸다. 주방에서 난 어머니 발자국 소리다. 식구들 잠 깰 까봐, 살금살금 다니던 어머니는 새벽이고 한밤이고 쿵쿵 소리를 냈다. 어머니 발소리가 크게 들릴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어머니는 척추 골절로 고생했다. 아흔을 넘긴 후로 보행기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몇 걸음 내딛지도 못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쿵 소리가 났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 발소리 간격은 점점 길어지고, 불규칙해졌다. 그리고는 그 소리 마저 못 내더니 2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 발소리는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말해줬다.

귀 기울여 들으면 발소리만으로 여러 가지 짐작할 수 있다. 건강상태는 물론, 남자 인지 여자인지, 성격이 급한지 느린지. 발소리 울림으로는 장소의 크기도 추측할 수 있다. 해서 라디오 효과맨은 발소리 기술부터 익혀야 한다.

발소리로 여러 가지 나타내듯, 목소리 만으로 많은 것을 담아 낼 수 있다. 노련한 성우는 목소리로만 성격은 물론, 체형, 장소, 시간, 계절, 심지어 의상까지도 표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장이 심하다고 웃어 넘길 지 모르겠다. 청취자가 그 세밀한 차이를 어떻게 알아채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만큼은 달라야 한다. 소리만으로 모든 걸 표현해 낼 수 있다는 믿음 가져야 상상력 풍부한 프로그램 만들 수 있다.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마닐라에서 시그니스아시아(SIGNIS Asia, 가톨릭 커뮤니케이션협회) 라디오 워크샵이 열렸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아시아 9개 국에서 20 명이 모인 자리에서 들려줬다. 내 기분에 취해 발을 굴러가며, 어설프게 흉내 내 보이기도 했다. 발표를 마치자 사회자 베르나르드(Bernard Canaberal)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자 발소리, 남자 발소리를 구체적으로 들려주며 보충 설명했다.

순간 나는 작아졌다. 돌이켜보니, 입으로만 아는 체했다. 소리 연기, 효과 연기 하나 제대로 해 보이지 못하면서 어찌 라디오드라마 PD를 했을까. 그것도 MBC에서, <격동 50년>을 3년 동안이나.

베르나르드는 스무 살 대학생 시절부터 성우를 했단다. 그 뒤로 연극배우, 작가, 연출을 거쳐 마닐라 라디오 드라마 매니저까지 지냈다. 워크샵 참가자들은 그의 안내로 마닐라라디오, MBC(Mannila Broacasting Company)를 견학했다.

MBC는 1938년, 필리핀에 최초로 세워진 라디오 방송사로 지금은 필리핀 최대 라디오 네트워크다. AM 채널이 2개, FM 채널이 2개다. AM 채널 중 DZRH는 드라마 채널인데, 뉴스와 시사,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를 편성한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져 가는 라디오 드라마가 여기서는 여전히 살아 남아 하루에 8편 정도 방송된다.

드라마 스튜디오는 7평 남짓. 십 여명의 성우들이 녹음하고 있었다. 한구석에 효과맨이 앉아있다. 의자 둘레로 깨진 접시, 손으로 들 수 있는 작은 철문같은 소품들이 반 평도 채 못 되는 좁은 공간에 놓여있다. 내가 일했던 스튜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촐하다.

▲ '효과맨' 제리 ⓒ김승월 전 MBC PD

누군가 싸우는 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효과맨은 앉은 의자를 들었다 놨다 하며, 접시와 소품을 부딪쳐 싸움판 소리를 냈다. 말 달리는 소리를 청하니, 사발처럼 생긴 코코넛 반쪽 2개를 각 손에 쥐고는 바닥에 댔다. 왼손, 오른손 번갈아 바닥을 두드리며, 말발굽 소리를 냈다.

성우가 ‘헉’ 채찍 내리치는 소리를 내자 두 팔을 재빠르게 움직인다. 성우들 호흡소리에 맞춰 말발굽 소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전력 질주했다. 모두 탄성을 지르며 손뼉 쳤다.

효과맨 이름은 제리(Gerry Mutia, 45). 필리핀 민도르(Mindor)섬 산촌 마을에서 자랐다. 바다가 가까워 바다와 산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농사일을 할 때는 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었단다. 열 네 살 되던 해에 가출해 마닐라로 왔다. 공사장 막일, 미장공, 오토바이 배달, 건물 관리인, 가리지 않고 이일 저일 해냈다.

10여 년 전 친구 소개로 필리핀의 전설적인 성우 엘로이사(Eloisa)가 하던 양성학원에 발을 들였다. 라디오 엑스트라로 시작했다. 성우 생활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 온건 5년쯤 지나서다. 효과맨이 은퇴하자, 그 자리를 당시 PD가 제안했다.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했다. 성우를 하면서 눈 여겨 봐둔 효과 기술대로 소리를 냈다. 극 중 상황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표현했다. 소리를 제대로 내는지 감독과 성우들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이제 4년 반이 지났다. 베르나르드는 그가 대본에 없는 소리도 창의적으로 표현해 낸다고 추켜세웠다.

필리핀에서는 효과맨이 성대모사도 한다. 새가 우는 소리, 짐승 소리도 낸다. 무슨 소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사랑하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란다. 자기 손 등에 입 맞추더니 얼른 거친 숨소리를 냈다. 주먹 쥐고 싸우는 자세를 잡더니 치고 받는 소리가 나왔다. 신들린 듯했다.

“효과음 낼 때마다, 내가 겪었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 기분으로 소리 내죠. 무서운 소리는 어릴 때 깊은 산 속에서 헤매다 들었던 무서운 바람 소리를 떠올리고요, 말소리는 고향에서 말 타던 때의 기분을 살립니다. 싸우는 소리는 싸우는 기분으로 내죠. 슬픈 장면에는 눈물 흘리기도 해요.“

박용철 시인의 <시적 변용에 대하여>처럼, 그가 겪은 체험 모두가, 그가 꿈꾼 상상의 세계가 효과음으로 변용되었나 보다. 제리가 만든 효과음 하나 하나에는 그가 살아온 흔적이 녹아 있다. 그를 만나고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효과음에는 효과맨의 삶이 배어 있듯, 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음을.

김승월 (전 MBC 라디오PD,현 인하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시그니스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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