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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장인의 일기장

[무소음 세상 20] 강화도 사투리와 말의 힘 안병진 경인방송 PDl승인2018.11.20 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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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나는 기록을 중요시 해. 뭐든지 기록해 두는 거. 내가 해병대 가서부터 일기를 썼으니까. 일기장이 30권도 넘게 있지. 1986년 1월 1일부터 보관하고 있어. 누가 내 일기장을 보고 가져갔어. 뭘 해보겠대. 이전 거는 저 너머로 이사하면서 어머니가 다 버렸지. 해병대에서 사랑하는 마누라에게 보낸 편지도 있고 그랬는데…. 그때는 나도 일기장을 소중하게 생각 안했지 뭐.”

취재는 엉뚱하게 흘렀다. 강화도 사투리를 녹음하러 갔던 것이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일로 바뀌어 있었다. 황원준(86세) 어르신. 강화 토박이인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대학노트에 한바닥씩 일기를 쓴다.

▲ 황원준 어르신의 일기장. ⓒ안병진 PD

“제목: 무릇 고는 일.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흐림. 고추농사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제초제 주던 약통을 부시지 않고 살충제를 뿌렸다. 이로 인해서 집에 난리가 났다…. 마당에 솥에다 물을 붓고 무릇을 고았다. 무릇은 한옥진 권사님이 주신 것인데 알맹이로 두 되 가량 될까? 하루 종일 불질을 했다. 무릇은 음력으로 사월에만 캔다. 오월 달에는 풀이 우거지고 녹음방초는 그 경치가 일품이다….”

일기장에는 간혹 신문이 보인다. 5월 29일 일기 옆에는 남북 정상이 부둥켜안고 있는 신문 사진이 붙어 있다. 그의 개인사에 한국의 역사가 끼어들었다. <한국일보>를 40년 동안 구독했고 지금은 <조선일보>를 보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다.

“신문이 교과서였지. 매일 신문을 봐. 사설을 읽어야 배우는 게 있어. 내가 중학교라도 가서 공부를 했으면…. 우리 시대에는 강화에 중학교가 없었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신문을 하나 얻으면 가져가서 그대로 베껴 썼어. 산에 나무하러 가서도 들여다보고. 공부하고 싶어도 가난하니까.”

어르신의 목소리는 크고 정확하다. 교회에서 장로 일을 하다 보니 남들 앞에서 기도를 많이 한다. 경사에는 축문을 하고 슬픔의 자리에서는 애도의 글을 낭독한다. 당신의 일기를 거리낌 없이 우리에게 읽어 주셨다. 나는 그의 경쾌한 목소리를 녹음했다.

“오후 예배 끝나고 젊은 여성들이 김장 김치를 하려고 교회에 모여 있었다. 아내가 준 고춧가루를 가지고 갔더니, 여성들이 총출동하여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있다…. 금년에 우리 김장은 각자 집에서 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우리 집은 조용했다. 하늘은 을씨년스럽게 흐려가고 해는 서산에 졌다. 며느리도 은순이도 잘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어둠은 밀물처럼 스며들고 아내와 나는 꿈속에 들어갔다.”

“와~ 소설 같아요. 소설을 한번 써보시죠?”

“내가 배우질 못해서….”

일기장을 들춰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엄마 생각이 났다. 험난한 인생을 살며 엄마는 일기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 불태워 버렸다. IMF 때였다. 집이 담보로 넘어가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다. 몇 해 전, 엄마는 그 이야기를 내게 덤덤히 하셨다.

▲ 황원준 어르신의 집안 모습. ⓒ안병진 PD

“반갑시다. 증말 반갑시다. 어서오시겨~ 그랬시다. 안녕하시겨~ 진지 잡으셨으까~"

강화 사투리 녹음하는 걸 나는 완전히 잊고 말았다. 평생 자신의 삶과 사회의 변화를 일기장에 홀로 써온 이 기록의 장인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 사투리를 담기 위해 왔던가. 무엇이 나를 강화로, 100년이 넘은 교회로, 김장하는 할머니들에게로, 그에게로 이끌었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던 걸까.

듣고 싶은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해줘야 하는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방황한다. 물음표 같은 인생에도 말줄임표 같은 삶에도 진정한 축사와 애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의 임무가 있다.

“만약 형편이 좋아서 어르신이 공부하셨다 해도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은 못 하셨을 거예요. 공부를 하셨으면 아마 박사를 하셨을 텐데, 이 일기들은 어느 박사가 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예요.”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그것이 오늘 그와 내가 만난 이유라는 것을, 이 말이 내 입에서 발화되는 순간 깨달았다. 어르신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나의 마음도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모님이 커피와 홍시를 내주셨다. 며느리에게도 주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어르신께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귀한 사람들이 초라한 내 집에 왔다며 하나님께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달라 하신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데, 아멘을 외쳤다. 우리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 그의 일기장엔 우리 이야기가 등장할까?

‘낮에 젊은이들이 초라한 우리 집에 왔다. 방송사에서 소리를 녹음하러 다닌다고 한다. 강화 사투리를 녹음하러 왔는데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내 일기를 보더니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이렇게 기록하는 일은 대단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해가 저물고 아내와 나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안병진 경인방송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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