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울리는 ‘보헤미안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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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울리는 ‘보헤미안 랩소디’
'싱어롱 떼창'까지 세 번째 관람만에 얻은 깨달음
  • 김훈종 SBS PD
  • 승인 2018.11.16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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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컷.

[PD저널=김훈종 SBS PD(<최화정의 파워타임> 연출)] 벌써 세 번째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온 지 30년이 넘은 중년의 아재가 영화관을 홀로 찾아가 꺼이꺼이 울다가 퉁퉁 부은 눈이 부끄러워 도망치듯 빠져나온 게, 벌써 세 번째란 말이다.

영화가 개봉한 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세 번째 관람에는 손발이 오글거리게도 ‘싱어롱 상영’이란 거창한 타이틀이 달려 있었다. 관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쉽사리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 했다. 벌써 세 번째 관람인 중년의 아재는 술기운이라도 빌었는지 용감하게 선창했고, 극장은 떠나갈 듯한 ‘떼창’으로 하나가 되었다. 흡사 ‘웸블리 스타디움’이 되어버린 듯 후끈한 열기와 에너지로 가득 찬 극장은 실로, 아름다웠다.

이미 다들 눈치 챘겠지만, 저 부끄러운 중년의 아재는 필자이고 극장을 전설의 라이브 공연장으로 바꿔버린 영화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보헤미안 랩소디>다.

필자는 직접 출연해서 진행하는 지상파 라디오 <씨네타운 S>와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 때문에 지난 6년 동안 매주 극장을 찾았다. 고백컨대, 일에 치여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영화관을 찾은 적도 많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두컴컴한 자리에 앉아 있노라면 졸음이 솔솔 밀려온다. 심지어 ‘20세기폭스사’의 팡파르나 ‘MGM사’ 사자의 ‘어흥’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이내 꾸벅거리기 시작해서 관객들이 떠나는 기척에 졸음을 깬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미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을 마치고 두 번이나 자진해 극장을 찾았다. 한 번은 졸려서 아닌 밤중에 까페라떼를 홀짝거리며 봤고, 다른 한 번은 ‘싱어롱’ 선창을 위해 맥주 세 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봤다.

“친구여! 우리는 챔피언이야. 그리고 우린 끝까지 싸워나갈 거야. 우리는 챔피언이야.” (WE ARE THE CHAMPIONS 가사 中)

이 희망차고 밝은 가사에 왜 눈물이 그토록 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에게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다. 영문도 모른 채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벅차오른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내러티브가 빈약하다’ ‘명곡 탄생 과정이 지나치게 과장됐다’ ‘배우들의 연기가 약했다’ ‘프레디 머큐리 역할을 맡은 라미 말렉 캐스팅이 아쉬웠다’ 등등 비판의 날을 세우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모든 걸 훌쩍 뛰어넘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랩소디를 굳이 번역하면 광시곡(狂詩曲)이라고 한다. 시라는 게 본디 이성의 영역이 아니거늘 하물며 ‘미친 시’라니!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부족한들, 배우들의 연기가 모자란들 관객으로서 느끼는 감흥의 무게추는 조금도 영향 받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광’은 ‘미쳤다(CRAZY)’란 뜻보다는 곡 형식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마디로 ‘자유인의 자유로운 노래’가 되는 셈.

아! 갑자기 미스터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이미 30년 전, 퀸은 <라디오 가가> 가사를 통해 라디오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시절 ‘퀸 그레이티스트 힛츠 1, 2’ 카세트 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듣던 소년은 여전히 라디오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불가해한 눈물의 근원에는 세상의 모든 찌듦에서 자유롭던 그 시절 소년이 덩그러니 서있다. 라디오에서 모든 걸 배우던 그 소년의 자유가 애끓게 그리워서 중년의 사내는 그토록 눈물을 흘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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