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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식량 위기

[비필독도서 ⑥] '바나나 제국의 몰락' 오학준 SBS PDl승인2018.11.27 14: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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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멸종 위기에 처했던 카사바. ⓒ픽사베이

[PD저널=오학준 SBS PD] 카사바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주민들의 주식이자, 쌀과 옥수수에 이은 세계 제3의 탄수화물 주요 공급원이다. 원래는 아마존 강 부근에 살던 주민들이 재배하던 작물이었지만,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며 이 작물의 운명도 바뀌었다. 유럽인들의 필요에 의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에 전파된 카사바는 이제 수억 명의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중요한 작물이 됐다.

그런데 한때 이 카사바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도 아주 작은 벌레 하나 때문에 수억 명이 의존하던 작물이 한 순간에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사실을. 1970년대 한 카사바 경작지에서 발견된 작은 벌레는, 고작 몇 년 만에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지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아무도 그 벌레가 카사바를 시들게 만드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가난한 자들의 주식을 갉아먹는 해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때문에 카사바를 시들게 한 벌레가 카사바가루깍지벌레라는 이름을 얻는데 만도 물경 5년의 시간이 걸렸고, 열정적인 연구자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관심을 ‘구걸’해낸 덕에 이 벌레를 공격하는 로페스기생벌을 기르고 방사해 결국 해충을 간신히 구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토록 치열한 ‘전투’에 대해 이 책을 펼쳐보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카사바에 닥쳤던 위기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던 작물 두 가지를 알고 있었다. 바나나와 감자였다. 20세기 초 아일랜드 전역을 뒤덮은 감자마름병은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을 기근으로 몰아갔고, 대다수 죽거나 아일랜드를 떠나야 했다. 단 맛이 강하고 단단해 운반하기 좋았던 그로미셸 종 바나나는 파나마병 하나로 완전히 멸종해버렸다. 둘 모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단일종만을 재배하다 벌어진 비극이었다.

피해 규모만으로 그 비극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비극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바나나는 주식이라기보다는 기호식품에 가깝고, 아일랜드 지역에 닥쳤던 문제는 냉정하게 말하면 카사바로 인한 재앙에 비해선 지엽적이었다. 만약 유전적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아 벌어질 식량 위기의 이야기에서 카사바 사례를 빠트릴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거리감’의 문제일 것이다.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 바나나와 감자는 우리에게도 익숙하지만 카사바가 내 식탁에 오를 일은 드물다. 게다가 카사바를 주식으로 삼는 지역이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 잡는 일 역시 드물다. 카사바에 벌어진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내 식탁과는 무관하다는 거리감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닐까.

▲ 롭 던의 <바나나 제국의 몰락>

<바나나 제국의 몰락>을 쓴 연구자 롭 던도 이 ‘거리감’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연구가 영미 지역의 문제에 비해 훨씬 덜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의 관심 밖의 지역이라고 해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게 덜 위험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제1세계 사람들과 무관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인류가 사시사철 원하는 작물을 먹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문제의 한 사례라는 것이다.

인류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맛있는 음식 재료들을 얻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문명이 시작된 순간부터 작물들을 개량해왔다. 자연의 도전을 물리치고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인류는 생산성이 가장 높은 종을 선택했고, 그 종을 대규모로 경작해 산출량을 늘렸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통제하고 품질을 관리한 덕에 인류는 더 많은 인구와 더 복잡한 문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택했던 전략이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과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을 희생시켰고, 그 때문에 작물이 병충해의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많은 인구가 몇 몇의 생산성 높은 작물들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라는 거대한 구조는 고작 작은 벌레나 바이러스 하나로 무너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재앙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재앙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저자는 인류가 자연의 도전으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일이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자연은 우리가 도망가면 갈수록 그것을 더 빠르게 망가트리는 데 능숙해진다고 말한다. 영원히 피할 수도 없는 경주,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따라잡히는 이 경주에서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있을까. 저자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들에게만 작물들을 맡기지 않고, 개개인들이 가능한 한 다양한 작물을 직접 접하고 재배하며 섭취하기를 권한다.

학자로서 인류의 욕망이 빚어낼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경고는 명료하고, 그 위기를 막기 위해 분투해 온 연구자들의 행위들은 때때로 숭고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 비극적 상황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 다른 대안들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카사바는 유럽인들의 필요로 인해 아프리카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곳에 사는 수 억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중요 작물이 됐다. 하지만 이 카사바의 멸종 위기 앞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몇몇 열정적 연구자들뿐이었고, 이들을 지원해주는 단체는 많지 않았다. 만약 카사바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먹고 즐기는 식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때에도 이때처럼 연구자들이 기금을 ‘구걸’하게 될까.

게다가 다양한 식재료를 접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주로 의존하는 특정한 작물에 닥칠 재앙에 그만큼 더 취약하다. 만약 옥수수에 병충해가 발생해 그 생산이 줄어들고 가격이 폭등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많은 가정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그들이 주로 소비하는 시럽, 콘플레이크, 빵, 케첩과 같은 식품들은 모두 옥수수가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른 음식을 권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들을 위기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책이 답하지 않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식량 위기를 바라보는 내 좁은 시야를 확대시켜 준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의 시야를 넓히는 이야기를 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양PD의 일이란 결국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며 사람들에게 문제를 알리고 수다를 떨기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편협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이 일을 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책이 끝난 곳에서 교양PD의 일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살고, 책을 읽는다.

 


오학준 S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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