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만난 괴짜 전위예술가, 김구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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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아트 페어 ‘프리즈 아트 페어’에 전시된 아방가르드 1세대 미술가의 작품은

▲ 2016년 6월 18일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이전 30주년 기념 특별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展 기자간담회에서 김구림 화가가 '도'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PD저널=이은미 KBS PD(<TV쇼 진품명품> 연출] 김구림 화백은 직접 그의 작품을 보면 절대 잊을 수가 없는 화가 겸 전위예술가다.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와 같은 시기에 아방가르드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괴팍한 성격과 독특한 세계관으로 국내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듯 한다.

필자가 그분을 처음 본 것은 2013년, 일흔이 훌쩍 넘은 백발의 김구림 화백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부제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이 싫어 뉴욕으로 떠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이 그리워 한국에 왔다는 화백은 끝없이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데, 스스로를 백남준보다 앞선 천재라고 믿는 독특한 화백의 정신세계에 당시에는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그가 괴짜인가 하면, 1960년대에 종이 캔버스는 너무 좁다며, 청계천 잔디밭에 쥐불을 놓아 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고, 서울대 입구에서 행인들에게 작은 알약 ‘마이신’이 든 봉투를 불시에 나눠주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행인들 자체가 예술이라고 했던 전위예술가다.

‘죽음의 태양’이라는 회화도 유명하고 훌륭하지만, 김구림 화백의 ‘일탈’과 ‘도발’을 보여주는 전위예술이 더 마음에 남아있다. 집과 방송사, 촬영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모범생 같은 생활을 하는 필자에게 그의 ‘괴짜 예술’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 1970년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다룬 당시 주간경향 기사. '전위화가 김구림은 정상인가'라는 부제가 달렸다.

기억 남는 미술가로 김구림 화백을 꼽으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문자로만 인사를 드릴 뿐,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뭐가 그리 바쁘다고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올가을, 김구림 화백에게 초청장을 받았다.

“와, 화백님 전시회 하시는 거에요? 오프닝 세레모니에 꼭 갈게요”라고 답을 했는데, 퇴근 후 초대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런던‘에서 열리는 전시회 초대장이었다. 세상에나. 제주도도 아니고 런던이라니. 장난인건지 진짜로 오라는 건지, 그 분의 성격을 아는 나는 김구림 화백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침 회사 입사 후 첫 긴 휴가를 가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딸아이와 함께 런던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화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니 미술관들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기품있고 우아한 미술 여행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이와 단둘이 가는 여행은 첫 계획부터 틀어졌다.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파악하지 못해 헤매다가 김구림 화백의 전시회 오프닝 시간을 놓쳤고, 그 다음날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화백님을 만나기로 했지만, 핸드폰 데이터와 배터리 문제로 또 서로 엇갈렸다.

세 번째 약속 끝에 ‘프리즈 아트 페어(Frieze Art Fair)’에서 김구림 화백과 가족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우아하게 예술품 감상을 하거나, 화백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세계 3대 아트 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 아트 페어’는 전시장도 두 개로 나누어 진행할 만큼 컸고, 내가 방문한 날은 초청장이 있는 예술가들과 언론사들만 입장 할 수 있었는데도 관람객이 많았다. 초청장이 없었던 나는 그냥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쉽지 않느냐며 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커피라도 사려고 커피숍에 줄을 선 사이에 김구림 화백과 이야기를 나누는 호사는 딸이 누리게 됐다. 괴짜 화백과 무슨 대화를 나눴나 싶어 나중에 물어 보니, 장거리 비행이 힘들지 않았는지, 영국에 오니 어땠는지 다정하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괴짜 화백에게 이렇게 다정한 면이 있을 줄이야.

글로벌한 '프리즈 아트 페어'를 관람한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인파에 또 기가 빨렸다. 하지만 계속된 전시회 행사를 치른 김구림 화백은 작품들을 더 보고 싶다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여든에 가까운 화백은 흰 머리도 더 늘었고, 예전보다 기력도 좀 약해진 것 같지만, 신인들의 작품을 보는 눈빛에선 에너지가 느껴졌다. 5년 전 미술 문외한에게 열정적으로 작품을 설명하고, 자랑하던 그 기(氣)다.

내가 런던에 머무는 동안 김구림 화백의 ‘죽음의 태양’ 회화 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봤던 작품이 영국 유명 전시관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니 김구림 화백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테이트 모던 한쪽에는 ‘백남준’ 화가의 미디어 아트도 크게 전시되어 있었지만, 나는 ‘죽음의 태양’ 앞에서 일부러 오래 서 있었다. 테이트 모던에 방문한 사람들이 한 동양인 관람객이 오래 서서 보는 작품에 한번이라도 눈길을 던지지 않을까 해서다.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런던과 베를린에 한 달 더 머문 김구림 화백은 베를린 대학에서 강연했다는 기사를 보내왔다. SNS로 보낸 글을 보니 여전히 ‘괴짜’ 화백은 정정한 것 같아 다행이다. 한 평생의 작품 활동을 고국에서는 알아주지 않으니 이렇게 자랑하는 게 아닌지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김구림 화백’은 백남준 아티스트보다는 덜 알려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방송 일을 하면서 툭하면 좌절하고 다시는 도전 따위는 안 하리라 마음먹는 필자에게 그는 여전히 최고의 ‘괴짜’, 전위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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