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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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오는 소리
[무소음세상 22] 강화 평화전망대
  • 안병진 경인방송 PD
  • 승인 2018.12.18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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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녹음을 하러다니며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할 때이다. 소리가 없는데 이걸 어떻게 라디오로 표현해내야 하나.

가령 백령도에서 만났던 점박이 물범과 두무진의 아름다운 풍경들. 겨울 아침 창밖에 눈 오는 소리. 해가 넘어갈 무렵 황혼 속으로 사라지는 새들의 소리. 분명 소리가 있는데 들리지 않거나 그 형체를 온전히 소리로 담을 수 없는 이 난처한 상황들. 이럴 땐 주로 음악을 깔고 내레이션으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즉, 말로 다 때운다.

녹음하러 돌아다니는 이 짓도 몇 년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소리가 없는 경우에는 변죽을 울려 분위기를 내고 그 소리를 짐작할 수 있게 유도한다. 소리 없는 본질을 상상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소리를 듣지도 않고 그것을 들었다고 착각한다. 내가 SNS에 올리는 소리 없는 이미지만 보고도 그런 반응이 나올 때가 있다. 실재보다 상상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요즘엔 강화군의 요청으로 ‘강화도의 소리’를 녹음하러 다닌다. 강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명소를 소리로 소개하는 작업이다. 오늘은 강화 평화전망대가 그 소재다. 평화전망대 주변의 엠비언스.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 실향민이 있으면 인터뷰도 하고 아이들 목소리가 있으면 더 좋겠지….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다.

민통선 검문소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견학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어어, 전망대에 애들이 있어야 하는데…. 올라가면 또 있겠지 뭐.”

▲ 강화 평화전망대. ⓒ안병진 PD

우르르 빠져나간 학생들이 모든 소리마저 몰고 간 것처럼 평일의 전망대는 고요하다. 모처럼 날이 화창해서인지 바람도 없고 새들도 어디론가 떠났다. 전망대에 오르는 길에 해설사 선생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남북정상회담 전까지만 해도 이곳 평화전망대 일대는 대북‧대남방송 소리로 혼이 비정상이 될 정도로 시끄러웠다고 한다. 확성기가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처음엔 무언가 허전하고 어색했다고 한다. 해설사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나마 전망대에 있던 한 가족이 사라졌다.

텅 빈 전망대에서 유리창 너머 풍경을 바라본다. 강 같은 바다.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곳. 휴전협정 이후 임진강 하구부터 시작해 강화 끝 말도까지 이어지는 67km 한강하구중립수역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올해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남북공동조사단 배가 이 바다를 처음 오갔다. 그 바다 너머로 북한의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멀리 개성공단 공업탑도 보이고 허연 송악산도 보인다. 5백원을 내고 망원경으로 보니 북한 사람들도 보인다. 추운데 오토바이를 타고 논길을 지나는 사람들. 소를 끌고 가는 사람들. 소리 없이 형체들만 움직인다. 소리가 있다 한들 그게 여기까지 들릴 리도 없지만.

유리창을 통해 보는 북의 모습은 마치 소리 없는 세상 같다. 실재로 내가 그 곳에 있다 한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마치 우주 공간에 아무 소리가 없듯 북한이란 공간도 무소음의 세상일 것만 같다.

아무 소리 없는 전망대 유리통이 갑갑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깥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멀리 바다도, 곁의 숲도 마치 짜고 그러는 마냥 어떤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럴 때 대남‧대북방송이라도 들리면 그거라도 녹음해 갈 텐데, 이제 그 소리도 사라졌다.

확성기가 사라지고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한동안 어색했다던 해설사의 말이 떠올랐다. 평화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 아니, 평화에는 소리가 없다. 날카롭게 대립하고 부딪히고 꺾이는 어떤 소리들 모두 평평해지고 고른 소리가 되는 것. 어느 것도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온전히 제 리듬에 따라 소리가 되거나 되지 않는 그 순간이, 바로 평화의 소리다.

▲ 금강산노래비에서 녹음하고 있는 모습. ⓒ안병진 PD

전망대 뜰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버튼을 누르면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조수미 목소리도 있고 플라시도 도밍고 버전의 노래도 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조형물에 마이크를 대고 녹음 버튼을 눌러봤다. 모처럼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등으로 느끼며 아무 소리도 없는 그 소리를 녹음했다.

간혹 멀리서 새소리가 들리다 만다.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이 소리를 강화 평화전망대의 소리라고 3분 캠페인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엔지니어를 포함해 모든 이의 평화를 일순간에 깨버리는 사고가 될 테지. 하지만 내게 평화의 소리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바로 이 소리다.

‘지금 들으시는 소리는 북한이 잘 보이는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듣는 평화로운 소리입니다.’ 3분 묵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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