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3.22 금 19:34

비디오테이프에도 밀린 라디오

[무소음 세상 23] 나의 건투 안병진 경인방송 PDl승인2019.01.03 13:41:2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그러니까 테이푸를 우리한테 만들어 줄 수 있어? 회원이 60명 조금 넘는데. 그거 복사해서 하면 다 만들어 줄 수 있지?”

“아, 선생님 저희는 라디오라서 소리 녹음만 해요. 영상은 찍지 않아요. 지난번에 말씀….”

“아, 라디오? 라디오야? 라디오를 요즘 누가 들어?”

“…….”

‘라디오 누가 듣냐’는 말은 그 동안 많이 들어왔지만 연세 팔십이 넘은 시골 어르신께 이 말을 듣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있는 어르신마저 이렇게 이야기하니, 나도 모르게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르신! 요즘 농악을 누가 들어요. 라디오에서나 나오는 거죠.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그러는데…. 아 그리고 요즘 누가 테이프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이 말을 삼키느라 나는 전화기에 헛기침만 해댔다.

“콜록~콜록. 녹음 잘 해서 들려드릴게요. 경기도를 대표하는 농악을 소개하는데, 선생님 소리가 빠지면 되나요. 저 지난번에 안산 축제 때 인사드렸던 사람이에요. 그 주차장에서 소주 주셨던…. 그럼 저희가 휴대폰으로 영상 찍어서 보실 수 있게….”

“아…. 여기 늙은이들 핸드폰으로 뭐 하는 거는 못해. 테이푸로 줘야지.”

‘테이푸’ 마니아이자 무형문화재 보유자이신 어르신께 허락을 받기 위해, 한 달 전 나는 관객도 없이 썰렁한 축제 현장에 찾아가 주차장에서 넙죽 그의 소주잔을 받아 든 적이 있다. 그때도 라디오 녹음이라고 다 말씀드렸는데, 또 다시 영상 타령을 하시니, 아무리 타령의 달인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이 아닌가.

“근데 지금 내가 감기에 걸려서 소리를 할 수가 없어. 감기 나으면 연락할게. 근데 테이푸로 줘야 우리가 볼 텐데.”

그의 집엔 정말 비디오가 있을까. 어떻게 그게 아직도 작동이 될까. 아니 이제 연세도 있고 하니, 영상으로 당신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는 말씀일까. 아니면 거절하는 건데 내가 말길을 못 알아들은 걸까. 그와 전화를 끊고 나는 또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하나. 그런데 기다리면 연락이 올까, 여러 고민에 빠졌다.

‘라디오 누가 듣냐’는 말은 그동안 많이 들어왔지만 팔십 넘은 어르신께 들은 건 처음이라서 새롭다. 또 TV, 스마트폰, 유튜브도 아니고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비디오테이프에 밀려보기는 또 처음인 지라, 전화를 끊은 나는 너덜너덜 망신창이가 되었다. ‘홀아비’ 얘기라도 할 걸 그랬나.

▲ 소리를 녹음하고 있는 모습. ⓒ안병진 PD

이래서 내가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같은 민요 아이템은 안한다고 했건만. 이미 위대한 콘텐츠로 완성한 것을 왜 또 다시 답습해야 하는가. 돈 준다고 다 해야 하나. 제작비 협찬을 받으려면 기존의 콘텐츠에 빗대 설명하는 게 편하지만, 문제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만들고 있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소리로 이해하고 그 소리로 스토리를 보여주는오디오 콘텐츠다.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은 ‘아~ 그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고 이해한다.

이러다보니 이게 요즘처럼 소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오디오 콘텐츠이고 에이에스엠알(ASMR)처럼 새로운 라디오 포맷이 될 수 있다고 백날 얘기해봐야 ‘그럼 농요나 민요, 요즘 듣기 힘든 소리 라디오로 들려주면 되겠네! 최고네!’라고 협찬을 해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러면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사라진 비디오테이프에 의문의 일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문제가 뭘까. 타이틀이 문제일까. ‘우리의 소리는 안 찾아서’라고 해야 할까. 설명이 부족한 걸까. 4차 산업혁명을 맞아 OTT와 유튜브 시대에 맞는 새로운 라디오 콘텐츠를 만들어보겠다고 헤맸는데, 라디오 전성시대를 살아온 노인에게 일패를 당하고 새해 벽두부터 피가 다시 끓어오른다.

맨날 똑같은 소리, 보유하면 다인가. 그거 테이프 시절, 이미 다 녹음하고 영상 찍고 할거 다 한 거 아닌가. 다음에 만나게 되면 어르신께 부탁하리라. 맨날 하는 모심는 소리, 새 쫓는 소리 이런 거 말고, 비디오 타령 해달라고 해야지. 라디오 타령 창작해 달라고 해야지. 소주 타령 해달라고 해야지.

이제 세상은 시골 노인 타령에 귀 기울이지 않지만, 라디오는 아직 당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고 말해 줘야지. 당신이 ‘테이푸’를 사랑하듯, 우리는 라디오를 사랑한다고! 우리는 아직 들을 게 많다고!

라디오를 사랑하는 분들이여, 올 한해도 라디오와 함께 행복하시길, 건투를 빕니다!


안병진 경인방송 PD  webmaster@pdjournal.com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여백
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58-715] 서울 양천구 목동 923-5번지 한국방송회관 10층l대표전화 : 02-3219-5613~5619l구독문의 : 02-3219-5618l팩스 : 02-2643-6416
등록번호: 서울, 아00331l등록일: 2007년 3월 5일l발행인: 안수영l편집인: 안수영l청소년보호책임자: 안수영
PD저널 편집국 : 02-3219-5613l광고 문의(PD연합회 사무국 · 광고국) : 02-3219-5611~2l사업제등록번호 : 117-82-60995l대표자 : 안수영
Copyright © 2019 피디저널(PD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d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