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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PD 10년 만에 휴직... 제작 현장 벗어난 뒤 비로소 느낀 'TV 시청의 즐거움'
  • 허항 MBC PD
  • 승인 2019.01.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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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허항 MBC PD] PD로서 느끼는 고충 아닌 고충이 있다. TV를 편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봐도, 시청자가 아닌 ‘업자(?)’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 시즌을 풍미하고 있는 드라마를 봐도 ‘어떻게 저런 미장센을 생각해냈을까’, ‘저 장면을 찍기 위해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을까’와 같은 업무적인 생각들이 순수한 스토리 몰입을 방해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더더욱 몰입이 안됐다. 모두가 배를 잡고 웃는 프로그램도, 동종 업계 사람으로서는 ‘시청자’가 아닌 ‘모니터 요원’의 자세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저 연예인은 어떻게 섭외한 걸까. 저 아이템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저런 기발한 자막을 쓴 PD의 뇌구조는 어떨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다른 시청자들이 힐링을 얻을 시간에 나는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왜 저 생각을 못했지. 나도 생각했던 아이템이었는데 왜 실행하지 못했지... PD로 일한 10년여 동안, TV는 분석‧비교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즐거움을 느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지난해 12월, 출산을 하면서 당분간 제작 일선에서 떠나게 됐다. 특별한 휴식 기간 없이 달려온 지난 10여년의 PD 생활이었던 터라, 3개월짜리 출산휴가를 신청하는 것부터 무척 어색했다.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 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육아하는 사이사이 PD로서의 내공도 업그레이드 시키고자 이런저런 계획부터 짰다. 기획안도 많이 써놓고, 아이디어도 많이 수집하고, TV시청, 아니 모니터링도 열심히 하겠다 등등.

하지만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응급수술로 아이를 낳게 되면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게 됐다. 기획안 구상은커녕 화장실조차 내 뜻대로 못가는 처지로 며칠을 보내야했다. 독한 마취의 영향인지, 머릿속은 계속 가수면 상태였다. 출산의 기쁨과는 별개로, 강하던 자의식은 흐릿해지고 아픈 몸뚱어리만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선 예능 PD가 아닌, 등록번호 2XXXXX의 환자일 뿐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병실에 누워 있다가 문득 12월 31일 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요대제전>은 잘 열리고 있나, 아직도 몽롱한 정신으로 병실의 TV를 틀었다. 트와이스가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예쁜 원샷들이 잡힐 때마다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이어진 BTS의 무대는 역시나 스튜디오를 들었다놨고, 엑소의 군무도 눈을 뗄 수 없었다. MC들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할 때는 병실에서 나도 작은 소리로 같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통증으로 한껏 처졌던 컨디션이 잠시나마 에너지를 얻은 느낌이었다.

<가요대제전>을 끝까지 다보고 잠들 무렵 깨달았다. 내가 처음으로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니터링을 할 만큼 컨디션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PD의 자의식이 잠시 떠난 그제야 온전히 한해를 마무리하는 축제를 즐겼다. 콘티와 MC 멘트가 어땠고, 무대 디자인이 어떠했는지 세부적인 요소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돌들의 에너제틱한 퍼포먼스와 표정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산후조리원에 와 있는 지금도, 기획안이고 아이디어 수집이고 아직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컨디션으로 아기까지 돌봐야 하는 일정 속에서, 유일한 낙은 TV보기다. 수요일에 <라디오스타>를 보며 깔깔 웃다보면 목요일을 보낼 에너지가 생기고, 목요일을 보내고 나면 <나혼자 산다>로 또다시 한바탕 웃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의 부담스러운 ‘업’이었던 <쇼! 음악중심>도, 이제 보니 참 에너제틱하고 예쁘다. JTBC<SKY 캐슬>은 네이버 톡방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시청자다.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할 에너지도 없고, 당분간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 허락한 즐거움이다.

TV를 보는 즐거움. 본의 아니게 그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오롯이 시청자 모드로 말이다. 말로는 늘 시청자의 입장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PD가 된 후에 정말 시청자의 입장에서 서본 적이 있었던가.

TV가 모바일에 밀려나는 시대라고 하지만, 고된 하루를 보내고 소파에 털썩 앉아 리모콘을 누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혹은 아픈 몸과 마음을 잠시 잊고, 우연히 튼 예능 프로그램에 깔깔 웃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들이 ‘즐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예능 PD로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언젠가부터 PD로서의 자기만족, 혹은 내 성취감만을 위해 열심히 달렸던 것은 아닌가.

물론 업무에 복귀하면, 나는 다시 시청자가 아닌 모니터 요원으로 돌아갈 것이고, 지금처럼 TV보기 자체를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느낌을 잘 기억해두고 싶다. 시청자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는 마음에 더욱 공감해보고 싶다. 기획안 쓰겠다고 가져온 노트는 아직도 백지지만, 기획안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얻은 것 같아 뿌듯한 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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