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정치인 퇴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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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정치인 퇴치법
[비필독도서⓽] '철인왕은 없다'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9.01.18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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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외유 추태' 논란을 빚고 있는 경북 예천군의회 청사 앞에서 예천군농민회 회원들이 "철면피 예천군의원들을 선출한 예천 주민으로서 몸 둘 바 모르는 부끄러움으로 대국민 사과를 드린다"며 108배를 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그것이 알고 싶다>연출)] 최근 예천군의회의 한 의원이 해외에서 술에 취해 가이드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시사 프로그램의 PD답게 관련 뉴스들을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사죄의 108배’라는 제목이 달린 뉴스를 봤을 때, 나는 그래도 사람을 때린 게 부끄러운 줄은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108배를 하는 사람들이 당사자가 아니라 군민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고민이 깊어졌다. 왜 군민들은 무릎을 꿇으며 사퇴를 ‘읍소’할 수밖에 없었을까.

정치인들이 사고를 치고 뻔뻔하게 행동할 때, 우리는 사람의 모자람을 탓한다. 정치인들의 모자란 염치를 탓하고, 그런 모자란 사람을 대표로 뽑아준 유권자들을 탓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누군가의 모자람을 탓한다고 해서 해결된 적이 있던가? 무릎을 꿇으며 부끄러워하는 군민들이 모자란 것은 아니라면, 해결의 실마리는 인성을 탓하는 데 있지 않다.

만약 그들이 뽑아준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고, 뽑는 사람들이 조금 더 성의를 기울여 사람을 고를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모자람을 탓하지 않고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이한 변호사의 <철인왕은 없다>를 그런 고민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뻔뻔한 정치인들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면 그들의 인성이나 유권자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조금 더 정치인들을 민의에 귀 기울이게 하는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을 민의에 묶어놓을 새로운 ‘고삐’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정치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그들이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의 이름은 대의 민주주의다.

대의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정치적 의사 결정을 내리고, 나는 나를 대신할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감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감시망의 그물은 성기다. 선거 때 내게 잠시 귀를 기울이는 척만 하고 고개를 돌려 자기들의 이익을 챙긴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반대로 열정적이고 참신한 정치인들도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의 진정한 열망이 무엇인지 알기는 힘들다. 단지 여론조사와 같은 표면적인 흐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여론조사가 정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여론조사 자체가 권력과 선동에 취약하다. 정치인들이 여론조사를 때로는 보물처럼, 때로는 헌신짝처럼 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불안정한 결합이다. 유권자인 인민은 자신을 대표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의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방법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의지에 대표들이 구속되도록 할 강제력이 없다. 대표는 무엇이 민의인지 모르기에 자의적으로 행하고,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인 민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요청한다. 대표가 인민의 의지를 자꾸 벗어나는 것이 문제라면, 대표를 없애고 각각의 인민이 스스로 결정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가정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인민 모두가 동등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다는 가정과, 가치의 문제는 선호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가정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거대해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또 모든 사안에 대해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흥미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몇몇의 사안들에 몇몇의 열정적인 이들이 큰 영향을 미친다면, 그들이 사실상 또 다른 ‘대리인’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직접민주주의 자체가 간접민주주의의 완전한 대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 이한 변호사가 쓴 <철인왕은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떤 형태의 시스템을 상상하고 있을까. 핵심은 ‘심의’다. 대리인이 어떠한 형태로든 필요하다면, 그들이 적어도 대리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의견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인 심의는 대리인들에게 진정한 민의를 알리는 통로다. 그것은 단순한 선호의 합이 아니라, 가치 자체를 두고 벌이는 진지한 대화다.

물론 심의민주주의에서의 토론은 단순히 자리에 앉아서 두런두런 나누는 덕담이 아니다. 여기엔 꽤나 엄격한 조건들이 따른다.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줄 독립된 전문가 집단, 입법에 준하는 수준으로 토론의 결과를 존중하도록 하는 입법, 누구나 평등하게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경제적인 지원과 같은 제반 조건들이 없다면, 토론은 무의미해진다.

그 점에서 저자는 꽤나 현실적이다. 단순히 규제적 이념으로서 ‘심의민주주의’를 도덕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심의민주주의의 모델이 도입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겪지 않도록 참여자들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수당을 지급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심의민주주의가 반드시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약 군 단위로 심의회가 생기고, 그곳에서 정치‧사회적 주제들에 대한 심도 높은 토론이 이루어지며 군의 입법, 행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유권자들이 적극적인 개입을 해낼 수 있다면, 애초에 108배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부끄러움’을 아는 유권자들의 의지를 따라 불필요한 해외 연수를 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점에서 이 책은 부끄러움과 염치가 없는 이들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안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심의’에 대한 약간의 낙관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하루아침에 그 제도의 취지에 맞게 사람들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에게 국민이 아닌 시민 되기를 요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토론은 얼마나 유의미할까.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을 해결하는 대리인인 ‘철인왕’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시민’인가. 그런 시민들의 사회를 꿈꾸어도 되는 것일까. 최장집 교수가 추천의 글에서 ‘시민’에게 과도한 도덕적 책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지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 거대하고 정밀한 상상은 그것을 실제로 운용할 사람들을 어떻게 길러낼지에 따라 공상이 될 수도 있고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시민을 길러내는 데 나의 일터는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 올바른 정보를 주고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헛소리를 따옴표 속에 담아 노출하고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는가. 우리는 시민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노예를 위해 일하는가. 멈출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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