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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뇌물’ 말고 진짜 가방

마르셜 뒤샹전, ‘여행가방 속의 상자’에 담긴 뒤샹의 취향 이은미 KBS PDl승인2019.01.31 16: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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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방은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아이템이라 겉 디자인은 신경 쓰면서도, 내부는 사적인 공간이라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중성을 띄고 있다.ⓒ픽사베이

[PD저널=이은미 KBS PD] 좋아한다고 말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까봐 또 속물처럼 비쳐질까봐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가방 마니아다. 가방을 너무 좋아해서 작은 가방, 큰 가방 두 개씩 들고 다닌 적도 있고, 가방의 모델명까지는 외우지 않지만 브랜드별 디자인과 최신 경향은 찾아보는 편이다.

휴가를 내고 혼자 가방 박물관을 가보기도 하고, 나만의 디자인 가방을 갖고 싶어 몇 달 동안 주말마다 가방 제작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가방의 이미지가 비리나 뇌물이 연상되기도 하고, 분수에 넘치게 명품이나 좇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누구와도 터놓고 가방 취향을 공유하지 못했다.

사실 제대로 알고 보면 가방처럼 흥미로운 물건도 없다.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은 ‘이동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또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아이템이라 겉 디자인은 신경 쓰면서도, 내부는 사적인 공간이라 쉽게 공개하지 이중성을 띄고 있다. 게다가 가방은 공간과 무게의 제약 때문에 ‘선택받은 소지품’만 넣는다는 점에서 더 매력 있다. 쓰임새에 따라, 모양에 따라, 시대에 따라, 누가 소지 하냐에 따라 변신이 가능한 것이 가방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세 개의 가방이 있다. 젊은 시절에 ‘어쩜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지’ 하고 감탄한 가방이 있다. 가죽이라 하면 그냥 평평한 재질이나, 악어가죽만 알고 있었는데 누비이불처럼 가죽을 마름모 꼴로 엠보싱 처리한 가방이었다.

후에 그 가방이 샤넬 브랜드의 가방이고 그 가격이 몇 달치 월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때부터 나는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좋아하게 됐다. 치렁치렁한 장식과 길게 끌리는 치마를 제거하고 20세기 여성 해방을 시작한 코코 샤넬. 그녀의 철학보다는 스캔들이 많은 디자이너 혹은 욕망의 브랜드로만 비쳐 내심 아쉽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가방은 조명희 작가의 소반자개백(bag)이다. 6년 전, 우연히 삼청동에 놀러갔다가 골목 모퉁이의 2층에 위치한 좁은 가게를 방문했다. 가게보다는 작은 전시 공간 같았다. 딱 봐도 기성품이 아니라 하나씩만 만든 작품들이었는데, 가죽에 동양적인 장식을 덧붙인 가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내 눈에 띈 가방이 ‘소반자개백’이다.

지름 오십 센티미터 정도의 동그란 가죽 가방인데, 한쪽 면이 옛날 소반의 상판처럼 되어있고, 그 안에 자개로 귀여운 호랑이를 새겨 넣었다. 가방을 메고 다니다가, 가방을 옆으로 눕히면 이동형 테이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어디서든 이 가방만 있으면, 음료를 올려놓고 마실 수 있다. 친구와 길을 걷다가 지치면, 그 자리에 멈춰서 길 옆 잔디밭에 가방을 펼치고 소풍을 즐기면 된다는 설명에 사람을 좋아하는 작가의 품성이 느껴진다.

세 번째로 기억에 남는 가방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마르셸 뒤샹 전시회에서 발견했다. 이번 전시는 꽤 괜찮았다. 뒤샹을 ‘변기에 사인 한번 하고 예술품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디어 좋은 작가’로 생각해 왔는데,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전시다.

뒤샹이 회화작품도 그렸다는 것을 이번 전시를 보고 알게 되었는데, 30대 초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여러 인기 화가들의 화풍을 따라 그린 그림들을 보니 뒤샹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써 놓은 편지에 ‘the’를 별모양으로 모두 바꾸는 등 언어적 실험도 시도했는데, 이미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뒤샹의 일대기와 작품들을 소개한 전시였다.

▲ <여행가방 속의 상자>,1934-41,1963-5,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Association Marcel Duchamp/ADAGP, Paris-SACK,Seoul,2018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는 뒤샹의 사진이나 소지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고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 새 다리도 아프고 지쳐서 전시의 후반부 작품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바로 그 후반부에 ‘여행가방 속의 상자’가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행가방 속의 상자’는 뒤샹이 6년에 걸쳐 자신의 작품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방 안에 담은 작품이다. 마치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가방 형태의 인형의 집 같다. ‘여행가방의 상자’ 안에는 논란이 된 ‘샘’은 물론이고, 그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영구 설치되어 이동할 수도 없고,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미완성품 ‘큰유리’까지도 들어 있다.

뒤샹은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작품 전시가 어려우니, 이동형 미술관을 만들고 영업사원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작품들을 소개하려고 했던 것 같다. 후에 이 작품은 복제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역시도 레디메이드 예술 장르를 개척한 뒤샹의 기획의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2006년 국내 미술관에서 구입을 할 때도,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느냐로 미술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뒤샹의 기획의도가 어디까지이든 간에 그 후로 여러 개의 여행 가방 시리즈를 만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비평가들은 A부터 G등급으로 미니어처 작품들을 바꿔가며 시리즈를 만든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뉘앙스다. 하지만 가방을 바꿔가며 소지품을 챙길 때마다 화장품, 수첩, 책, 마스코트 인형, 물티슈 등 넣었다뺐다를 반복하는 사람들이라면 뒤샹도 자신의 작품 중 일부만을 선택해 넣는 것이 아쉬웠을 거라는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노마드 라이프를 표방하고 모든 대상에게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뒤샹. 그 때문이었나.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한 여자에게 머물지도 않았다고 한다. 취향도 하나에 고착되면 권력이 되기 때문에 자신은 취향이 없는 것이 취향이라고 했다고 한다.

뒤샹이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뒤샹의 어린 시절에서 찾기도 하는데, 뒤샹의 엄마가 자녀에게 애정 표현을 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식으로 교육을 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들 닮아 모든 것에 거리를 두다 보니,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방에 집착을 하는 것은 가방 모양이 마치 여성의 자궁과 같은 모양인 것에서 추론해 볼 때 모성애를 받지 못한 결핍 때문에 그렇다는 심리분석 책을 본 적이 있다.

뒤샹의 ‘여행가방 속의 상자’도 이런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일까. 나의 가방 사랑 역시도 혹시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였는지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가방 하나로도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것을 보면, 가방이라는 존재가 요물은 요물인 것 같다. 이래서 가방을 좋아한다는 취향을 밝히기가 어렵다. 


이은미 K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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