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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꽃을 닮은 사람

[뽕짝이 내게로 온날 42] 10년 만에 드러난 작은 비밀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l승인2019.02.15 11: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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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초여름의 산등성이는 고생길이었다. 시 단위 자문위원 자격으로 ‘걷기 탐사’에 나선 길이었다. 주최 측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고 ‘사드락 사드락 마실길을 다니는 심정으로’ 참석한 것이었는데 개회 선언 후 첫 발을 내딛은 뒷산은 90도 각도의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선발대는 휘리릭 바람처럼 고갯길을 넘어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산허리를 돌아 반대편에서 만나기로 한 터라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나는 당시 항암 중이어서 체력 저하와 컨디션 난조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당한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권고는 공허한 울림 같은 것이었다.

식은땀이 나고 다리는 납덩어리를 메달은 것처럼 무거웠다. 무슨 자랑이라고 항암 중임을 고백하고 자리를 뜨는 것도 난처했다. 돌아가자니 앞 사람과 연락할 방법이 요원하고 따라가자니 힘에 부쳤다. 진퇴양난이었다.

이게 다 암 때문에 생긴 사단이라며 슬쩍 자기 비하에 빠질 무렵, 한 여자가 산들산들 다가왔다. 출발 전부터 나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날의 컨디션 난조로 심사가 뒤틀려서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마음도 생기지 않았던, 옹졸한 내 처지였다. 한번 인사할 타임을 놓치고 몇 번의 눈인사도 엇나가기만 했으니 어색할 법도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 여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서 내 상태를 살폈다.

시작하기도 전에 땀에 절어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방치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늦더라도 나와 함께 가겠다고 먼저 가라고 기별을 전했다. 그 여자는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권하고 나를 안심시켰다. “제가 선생님이랑 같이 갈게요. 걱정 마시고 천천히 가시게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여자는 빼앗다시피 내 가방을 가져다가 둘러메고 앞서 걸었다. 한들한들 산길을 앞서갔다. 

길을 걸어요 이제부터 새롭게
길을 걸어요 우리모두 힘차게
있잖아요 거릴 비추는 밝게 빛나는 저 높은 태양
있잖아요 우릴 바라보는 모르는 이들의 정다운 눈길
(중간 생략)
그리고 흔들리지 말아요
언제나 푸른 나무들 처럼
길을 걸어요 이제부터 새롭게
길을 걸어요 우리모두 힘차게

(권진원 노래 <길을 걸어요> 가사 중)

친절을 분양받고 나니 비로소 돌멩이도 제자리에 박혀있고 작은 풀잎은 발 아래서 간질이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다정하게 스며들었다. 동행이 있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그 여자는 대여섯 걸음 앞서가며 가끔씩, 무심하게 나를 돌아다 볼 뿐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나아갔다. 내가 뒤처지면 다시 잰 걸음으로 돌아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를 기다리곤 했다.

산길에 익숙해지면서 숨소리도 제법 정상으로 돌아오고 걸음걸이도 온전해 질 무렵, 그 여자는 눈앞에 고개 마루를 가리키며 “선생님, 저기만 넘어가면 그 다음부턴 평탄한 길이예요. 조금만 힘내요”라고 격려했다. 아는 사람의 지도를 받으니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조심조심 비탈길을 올라 고개를 넘었다. 내가 안전하게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길을 재촉하던 그녀는 돌탑 무덤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 하늘나리꽃이네!”

조용히 아무말 하지 말아요 당신의 두 눈을 보고 있어요
이렇게 곁에만 있어 준다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오 미워할 수 없는 내 님 순결한 꽃 한송인가 
오 미워할 수 없는 내 님 영원한 내사랑
(이종용 노래 <꽃 한송이> 가사 일부)

검은 점을 품은 진홍색 꽃 이파리가

▲ 나리꽃. ⓒ픽사베이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쳐다보고 있어서 하늘나리라고 한다는데 멸종위기 법정보호종이라고 한다. 그 여자가 가뜩이나 반색하며 반기는 모습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점점 안정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는지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좋은 선물을 주셨거든요.”

뜬금없는 옛날이야기에 다소 어리둥절했는데, 그녀의 고백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되었을까. 한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어떤 행사의 글짓기 심사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심사위원과 임원들이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흉허물 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심사 기준을 정한 후 본격적인 심사를 거쳐 점수표를 내놓게 되었다.

심사를 하는 경우,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완성도와 안정된 문장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전제 아래 창의력과 실험성을 어떻게 작품에 녹여내는지, 그 점을 눈여겨 보고 있다. 상상력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야 말로 작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조건이라면 ‘창의력’과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에 가능성을 보고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글짓기 대회에 참석한 작품들은 대부분 그러한 기준으로 평가되었을 것인데, 심사위원들의 심사표가 공개되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제일 점수를 높게 준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이다.

장원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내가 최고점을 준 작품은 차하를 차지했다. 그때의 상황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심사과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심사위원으로서 뭔가 큰 줄기를 놓친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이 합의된 바에 부응하지 못한 판단의 오류를 의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내가 심사위원으로서 객관성이 결여된 것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빠졌다가 혹은 주최 측이 원하는 특정인물이 내정된 것은 아닐까 하는 위험한 발상도 가졌음을 고백한다. 그 심사는 두고두고 개운하지 않은 의문점을 남겼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때의 글짓기 행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주최 측의 회장과 불편한 관계였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대회에 참석은 했지만 자신이 입상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했다.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글을 계속 써야 할지 고민도 많았고 인간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컸던 어려운 시기였는데, 유일하게 나로부터 최고점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졌고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제 은인이세요. 제가 선생님 덕분에 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어요. 그 얘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 마음에만 새기다가 오늘에야 말씀드리게 되었네요.”

그 여자는 또박또박 말했다.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게 되어 자세히 바라본 그녀의 눈은 맑았다. 다행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크고 작은 백일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좋은 시인이 되었다. 자신에게 최고점을 준 김사은이라는 심사위원을 생각하며, ‘그래! 누군가는 나를 최고로 평가하고 있다’는 믿음이 자신감으로 길로 이끌어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지켜보기를 10년,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 보니 10여 년 전 그 심사에서 내가 그 작품을 최고점으로 올렸을 때, 적잖이 당황했던 대표의 얼굴이 스쳐갔다. 명색이 이름을 내건 백일장인데 개인적인 감정으로 수상자 순위가 바뀔 수 있을까 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던 상처를 나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내가 나서서는 안 될 자리에 마지못해 초대받은 것 같은 불편함의 찌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야 그날의 꺼림칙한 기분을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10여 년이 지나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믿음에 보답해준 그녀가 참으로 고마웠다.

“선생님이 오늘 이 등반을 완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제가 선생님 드리려고 블루베리 잼을 만들었어요. 자동차에 두고 왔으니까, 다시 출발지까지 가야 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가는 길에 아침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건 그대와 함께 있는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즐거움에 웃음짓는 나날이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해바라기 노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가사)

그날, 그 여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곤경에 처해있을 때 내 옆을 떠나지 않고 보호해준 따뜻한 배려도 고마웠는데, 10년 만에 돌아온 ‘확신’은 ‘우정’이라는 이자까지 얹어 주었다.

좋은 후배이자 도반이자 동반자로서 마치 세 사람의 친구를 한꺼번에 얻은 것처럼 뿌듯했다. 10년 동안 진실을 꼭꼭 싸매고 있다가 민들레 씨앗처럼 드러난 우리들의 작은 비밀은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됐다. 나리꽃의 꽃말은 진실이라는데 그렇게 나리꽃을 닮은 여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글에 대한 신념을, 진실에 대한 확신을 전한 것이다.

참 고마웠던 그녀는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정리가 필요하다며 어느 날 모든 것을 놓아두고 훌쩍 떠났다. 그렇게 소리 없이 몸을 숨긴 지 이태가 되어간다. 나는 그녀가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립지만,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순간 “짠!” 하고 나타나서 “어머, 하늘 나리꽃이네!” 라고 외치며 한들한들 기뻐하고 즐거워할 그날을 위해 참고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좋은 글 많이 쓰기를 기도하고 있다. 몇 년 전 산굽이에서 헤매던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던 그 마음으로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인정을 베풀며 어디에서든 삶의 한편을 곱게 닦아 가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녁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이 오면 연두빛 고운 숲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풀 무덤에 새까만 앙금 모두 묻고
마음엔 한껏 꽃 피워 봄 맞으러 가야지
봄바람 부는 흰 꽃 들녘에 시름을 벗고
다정한 당신을 가만히 안으면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나네 
봄이 오면 봄바람 부는 연못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노저으러 가야지
나룻배에 가는 겨울 오는 봄 싣고
노래하는 당신과 나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이 오면
(김윤아 노래 <봄이 오면> 가사)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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