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훈풍에 속도 내는 ‘겨레말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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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중모색 지나 편찬 작업 80%까지 진척...MBC 오는 10월 특집 다큐 방송 계획

▲ 한글박물관 '사전의 재발견'기획전에 전시된 '말모이' 원본. ⓒ정길화 PD

[PD저널=정길화 MBC PD·언론학 박사] 28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남북관계에서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북 제재가 해소되면 남북의 교류와 협력은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잃어버린 9년'도 차차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의 하나가 ‘겨레말큰사전’이다. 지난 2015년 이후 중단되었던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이사장 염무웅, 이하 겨레말큰사전사업회)의 편찬위원회 전체회의가 오는 3월 15일부터 25일까지 중국 선양에서 재개될 예정으로 있다. 4년 만이다.

모든 일에는 연원이 있다. 겨레말큰사전의 씨앗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뿌려졌다. 분단 이후 우리말의 이질화를 우려한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통일국어대사전’ 남북공동 편찬을 제안했던 것이다.

문 목사는 방북 이후 우리가 알다시피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수난을 겪었고 5년 뒤에 통일의 염원을 안은 채 돌아가셨다(올해는 문 목사 방북 30주년이자 서거 25주기이기도 하다). 이후 겨레말큰사전은 오랜 암중모색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03년 문성근 통일맞이 이사와 정도상 집행위원장이 평양을 방문, 북의 안경호 6‧15공동위원회 북측준비위원장에게 사전편찬 사업을 다시 제안했다. 2004년에는 문익환 목사 10주기 추모 행사에 참가한 북 대표단을 통해 박용길 장로가 친서로 ‘통일국어대사전’ 편찬을 요청했다. 이어 남의 통일맞이와 북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중국 연길에서 가진 ‘통일토론회'에서 사전편찬 의향서를 체결하고, 사전 명칭을 <겨레말큰사전>으로 결정했다.

▲ ‘사전의 재발견’ 기획전에 전시된 사전들. ⓒ정길화 PD

왜 '겨레말큰사전'인가

‘겨레말큰사전’이란 말은 남측 편찬위원회의 정도상 작가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남측의 ‘표준어’도 아니고 북측의 ‘문화어’도 아닌 다른 말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민족어’나 ‘우리말’도 생각해 보았지만 ‘민족어’보다는 고유어를 사용하는 게 좋았고, ‘우리말’은 이미 ‘우리말큰사전’이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겨레말큰사전>인데 이로써 겨레말은 남북뿐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 연해주,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이 쓰는 한국말까지 포괄하는 개념이 됐다.

이후 실무 접촉에서 합의서와 부속합의서 등을 체결하고 공동편찬위원회가 발족했다. 14년 전인 2005년 2월 20일에 금강산에서 편찬위원회의 결성식과 첫 번째 전체회의가 이루어졌다. 이날은 겨레말큰사전의 생일과 다름없다. 이후 2015년까지 11년간 수차에 걸친 공동편찬회의가 열렸다. 이때까지 총 24,076개의 집필 원고를 검토해 19,799개의 1차 합의 원고가 완성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제25차 다렌 회의 이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공동작업은 중단됐다(겨레말큰사전사업회 연보 참조).

그러다가 지난해 4‧27 등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겨레말큰사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018년 12월 국회는 사업회의 기간을 2022년 4월까지 3년 연장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편찬사업회에 따르면 사전 작업은 작년까지 약 80% 내외의 공정을 보였다고 한다. 남과 북 두 사전(‘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된 약 80만 개의 올림말을 대상으로 <겨레말큰사전>에 수록할 표제어 23만여 개를 남북이 함께 선별했다고 한다. 앞으로 총 33만 개를 합의하는 것이 목표다.

한글 창제 이후 첫 '사전 통일'

이제부터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은 미약하고 나중은 창대하다고 했던가. <겨레말큰사전>이 완성되면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완성되는 남북의 사전통일이다. ‘사전’의 우리말은 ‘말모이’다. 바야흐로 남과 북의 말이 모이고 뜻이 모인다. “말은 사람들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다.”(‘우리말큰사전’ 머리말, 1947년) 이제 정신과 물질의 재산이 늘어나게 됐다. 완제품은 디지털로도 제작된다.

올해 초 개봉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 <말모이>는 '제2의 말모이'인 <겨레말큰사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에 힘입어 겨레말큰사전사업회와 MBC는 다큐멘터리 제작 등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10월 경에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다. 때마침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사전의 재발견’ 기획전이 열렸다. 지난해 9월 시작한 기획전은 원래 작년 12월말까지 전시하는 일정이었는데 영화 <말모이>에 힘입어 오는 3월 3일까지로 전시 일정을 연장했다.

‘사전의 재발견’ 기획전에 가봤다. 19세기말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자전, 한영자전을 필두로, 주시경의 말모이 원본, 일제 강점기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을 겪고광복 후에 완성한 우리말큰사전, 북한에서 나온 조선문화어사전 등이 전시되고 있다. 모두 <겨레말큰사전>의 뿌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전,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질문이 관람객을 맞는다. 마치 “겨레말큰사전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삶에서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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