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형 PD’가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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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형 PD’가 된다면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는 연출 경험... 후임 연출자에게 절실한 '연출노트'
  • 허항 MBC PD
  • 승인 2019.03.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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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허항 MBC PD] 하루에도 가득 쏟아져 나오는 신간 중에서 대형서점 매대를 차지하는 책은 극히 일부분이다. 언론에 소개되지도 않고 별다른 홍보 없이 숨어 있던 좋은 책을 발견하면 로또를 맞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그것도 신간이 아닌, 조금 지나간 책이라면 더더욱. 최근 ‘발견해서’ 읽은 <기록형 인간>(이찬영 저/2014년/매일경제신문사)이 그랬다.

얼마 전 어느 대학 수업에서 PD 업무에 관해 짧은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해오던 일에 대한 것이니 준비가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고 PPT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런데, PPT 첫 장부터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할지 난감했다. 머릿속에는, 프로그램 연출을 업으로 삼으며 겪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떠다니는데, 그걸 어떤 식으로 정리해 강의로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겨우겨우 몇몇 유의미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PPT 위에 대충 정리했지만 뭔가 꽉 채워진 PPT가 아닌 것 같아 아쉬웠다. 프로그램 만들며 가장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회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다시 이야기하려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작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원인과 결과가 어떠했는지 또 가물가물했다.

당시의 구성안이나 큐시트도 보관되어 있지 않고, 가끔 쓰던 일기도 언젠가부터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연출 일을 하면서 겪었던 희로애락이라든가, 간단한 연출 소감이라도 그때그때 적어놨더라면 아마 그 강의는 훨씬 알차고 진정성 있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작은 기록들이 참 아쉬운 순간이었다.

여러모로 마음에 차지 않았던 강의를 끝내고, 바로 대형서점 사이트에서 ‘기록’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리고 기록하는 법에 대해 가장 잘 가르쳐준다는 독자평이 연이어 달린 책을 만났다. 바로 <기록형 인간>이다. 저자는 국내 대기업에 20년 동안 근무한 후, 중국에서 본인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CEO다. 회사원과 경영인으로 살면서, 본인이 깨달은 ‘기록’의 중요성을 꼼꼼히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명료하다. 바로 ‘기록한 것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역사도 결국 기록된 것들만의 집합이 아닌가.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책을 읽거나 명강의를 들어도, 따로 적어두지 않으면 기억은 휘발되어 버리기 일쑤다.

강렬했던 경험도, 따로 사진이나 일기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10년 후에는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저자는 기록을 제대로 안해서 겪었던 자신의 실패담들을 솔직하게 풀면서,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가는 기록 노하우를 꼼꼼히 전수해준다.

저자는 승정원일기를 보유하고 있는 기록의 민족이, 갈수록 기록에 대해 해이해져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삼풍백화점 사건 당시 건축 과정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결국 원인 규명을 제대로 못했다는 일화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됐다. 과거사 진상규명 움직임 속에서도 기록이 부실해 규명이 어려운 사건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반면 고객의 돈을 사기 친 범죄자로 구속될 뻔했다가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를 기록한 일기로 알리바이를 입증해 무죄로 풀려난 한 금융인의 사례는 참 흥미로웠다.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종이 위에 글로 쓰는 ‘기록’과는 그다지 친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매주 방송을 내고는 스태프와 술 한 잔 부딪치며 머릿속에서 힘들었던 기억을 털어버리는 데 바빴다. 미니멀리즘에 어설프게 편승해 지나간 큐시트와 콘티, 구성안들도 굳이 모아두지 않다보니, 기억은 더욱 파편적으로만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 나간 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큐시트와 대본을 정리해두고 내 나름의 연출노트라도 기록해두었다면, 정말 멋진 ‘데이터베이스’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 데이터베이스는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후임 연출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개편 때마다 연출자가 바뀌는 레귤러 프로그램이나 매년 제작되는 특집 프로그램의 경우 ‘전임자의 노하우가 담긴 연출기록이 남아있었다면’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잘했던 일, 실수했던 일, 섭외나 예산 운용 노하우 등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 남겨 놓는다면 후임 연출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 없이 더 효율적으로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저자는 되도록 종이에 펜으로 기록하는 것이 더 감각적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오랜만에 펜을 들어 오늘 스쳐가듯 떠오른 작은 아이디어부터 적어가기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것이 나에게 좋은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록물이 된다면 참 뿌듯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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