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와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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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와 스토리텔링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전' 8월 4일까지 전시... 연작시리즈 '난봉꾼의 행각' 눈길
  • 이은미 KBS PD
  • 승인 2019.04.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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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이은미 KBS PD] 음악 마니아는 아니다. 하지만 가수들의 신곡이 나오면 뮤직비디오는 꼭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뮤직비디오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1990년대, 2000년대만큼 큰 재미가 없다. 음원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에 비해 음원 수익이 신통치 않아서 그런지 뮤직비디오 투자가 과거보다 많이 준 느낌이다. 풀샷과 얼굴 클로즈업 등으로 가수에 초점을 맞추는 뮤직비디오들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뮤직비디오가 있다. 배우 이병헌과 김하늘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비디오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절절한 스토리를 담은 이 뮤직비디오로, 김세훈 감독은 국내 뮤직비디오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 작품에도 스토리를 담은 연작들이 있다. 며칠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전을 시작했다. 현재 생존하는 화가 중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약1019억원)를 작년에 기록했기 때문인지 전시 첫날부터 포털 검색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회에 최고가 그림 <예술가의 초상>은 없다.

대신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 시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에칭 판화 연작 ‘난봉꾼의 행각(rake's progress)'이다. 뉴욕에 도착한 한 영국인이 뉴욕커들을 만나고 새로운 삶에 설렜지만 곧 실망하고 술집에서 외롭게 술을 마신다는 내용을 담은 16점의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를 ‘최고의 그림값 화가’가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화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 반가웠다. 작품 발표 후 사람들은 그림 속 남자가 데이비드 호크니라고 추정했다. 그는 그림 속 남자는 자신이 아니라 했지만, 대신 ‘나는 그 주변에 있어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런던과 뉴욕에서 살아온 화가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담은 연작 아닐까. 

▲ 지난 3월 22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서 전시 중인 '클라크 부부와 퍼시'

재미있는 것은 이 연작 시리즈의 제목이 18세기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과 제목이 같다는 점이다. 호가스는 ‘영국의 김홍도’로 국내에 소개되곤 하는데, 그보다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최고의 화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윌리엄 호가스를 알게 된 것은 작년 가을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유행에 따른 결혼(Marriage a la Mode)’ 이라는 6점으로 구성된 시리즈를 봤을 때이다.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파산한 가문의 아가씨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자 귀족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하는데, 이 신혼부부는 결혼 초기부터 각각 외도를 한다. 설상가상 어린 아들은 불치병에 걸리고, 신부의 외도 현장을 덮친 신랑은 오히려 정부에게 칼을 맞는다. 결국 집안은 파산하고, 신부는 과부가 되지만 신부의 아버지는 위자료에만 관심이 있다는 내용으로 그 스토리가 막장드라마 뺨친다. 스토리만 들어도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데이비드 호크니 역시 윌리엄 호가스의 스토리텔링에 흥미를 느꼈나 보다. 그래서 이번 서울전시에서 선보인 연작 제목도 300년 전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 ‘난봉꾼의 행각’ 작품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스트라빈스키 역시 1947년 시카고에서 우연히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동명 <난봉꾼의 행각>이라는 오페라를 3년에 걸쳐 작곡했다고 한다. 역시 스토리는 힘이 있다.

국내 고미술 전시회를 가도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 없는지 병풍들을 눈여겨본다. ‘수호지’‘춘향전’ 등의 이야기를 담은 4폭, 6폭 병풍들이 있지만, 춘향전을 제외하고는 스토리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서양 작품들에 비해 이해하기도 흥미도 적었던 게 사실이다. 고미술 회화 작품들은 인물들 표정이 다 비슷비슷 하고, 동작들이 생생하게 담기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같은 스토리도 ‘스토리텔러’가 누구냐에 따라 재미있고 없고가 판가름 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조상님들은 점잖 빼느라 그랬는지,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이 다들 포커페이스다. 동작들도 소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스토리는 출중하다 해도 스토리텔링 면에선 매력이 좀 떨어진다고 감히 감상평을 해본다.

그렇다면 방송 콘텐츠에도 스토리가 있을까. 아마 대다수 연출가들이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스토리 없는 프로그램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PD는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조연출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나 관찰 예능 같은 논픽션에서 스토리를 만들기엔 변수들이 너무 많다. 아무리 PD가 머릿속에서 시나리오 A,B,C 버전으로 준비해도, 촬영에 들어가면 현실의 인물들은 ‘드라마’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머릿속은 늘어나는 예상 시나리오들로 뒤죽박죽이 되고, 결국엔 욕심을 내려놓고 논픽션 인물들을 팔로우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다.

이렇게 촬영이 끝나면, 편집실에 틀어박혀 스토리를 ‘텔링’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논픽션’의 특성 때문에 장르 자체에 회의감과 배신감을 갖는 PD도 여럿 봤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이런 우연성과 돌발성에서 논픽션의 재미와 진정성이 나온다고 하니 매번 스스로 위로를 해본다.

그렇게 장르를 탓하는 사이에 최근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보았다. 바로 ‘뉴스’ 영역에서다. 모 방송사 뉴스를 보는데 기상캐스터가 내일은 바람이 세게 불 것이라고 일기예보를 한다. 예보가 끝나고 관련 뉴스가 이어지는데, 강풍이 불 예정이니 화재 조심하라고 위험을 경고하는 뉴스였다.

그리고 화재 시 출동하는 소방차가 불법 주차한 차량들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는데, 앞으로는 이럴 경우 차량을 훼손해도 소방당국은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뉴스가 이어졌다. 마지막은 길 가에 주차된 차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장식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작시리즈처럼 스토리를 담은 뉴스를 만드는 제작진의 고민과 열정이 놀라울 뿐이다.

뮤직비디오도, 그림도, 뉴스도 스토리텔링을 잘하면 사람들은 쉽게 내용을 이해하고 더 공감한다. 표현의 매체들이 결국 ‘설득’이라는 본질을 향한다고 할 때, 스토리텔링은 중요한 수단이 된다. 스토리를 풀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처럼 함축적이지 않아 촌스럽고 오글거릴 때가 더 많다.

하지만 감동, 풍자, 경고라는 각각의 본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스타일보다는 스토리’를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리텔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만큼 PD와 제작자들에게 ‘스토리텔링’은 영원한 숙제다. 물론 일부 예술가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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