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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라디오

때론 침묵으로 선명해지는 메시지...라디오는 침묵의 그릇이 될 수 있을까 박재철 CBS PDl승인2019.04.25 12: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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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스틸컷.

[PD저널=박재철 CBS PD] 트루디의 안색이 어둡다.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보를 방금 들어서다. 트루디는 늘 말했었다. “일본에 가보고 싶어. 후지산과 벚꽃을 당신과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어. 당신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 없어.”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암시 받는다. 둘은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오를 것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것. 두 가지는 곧 현실이 된다. 둘은 길 위에 서고, 둘 중 하나는 그 길 위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예감의 적중률은 5할이다. 길 위에서 사라진 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편 루디가 아니다. 그 사실을 ‘선고’ 받은 트루디였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은 관람 후 이런 저런 생각들을 꼬리 연결하듯 불러 모은다. 노부부의 자녀 탐방기를 담담히 그린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를 가져와 줄거리의 골자를 세운 것부터 그렇다. 잊었던 오즈의 영화를 떠올게 하고, 오즈의 어떤 점을 기리는 오마주인지를 고민케 한다.

거기다, 전작 <파니 핑크>에서 독창적인 미장센과 고유한 색감을 보여준 감독 도리스 되리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있다. 주제의식은 어떤가? 누군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시구의 참된 의미를 묻는다면, 뛰어난 영화는 분명 이런 식의 답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게 한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 그 당시 나에게 남긴 묵직한 과제가 한 가지 더 있다.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이기도 한데 라디오가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넘사벽’의 지점이다.

루디와 트루디는 독일의 조그만 마을 알고이(감독의 실제 거주지)에서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다. 영화는 따뜻한 봄날 알고이의 마을 풍경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의 평온한 얼굴과 그 얼굴을 꼭 빼닮은 비포장 시골길, 그 길에 무람없이 핀 들꽃들과 오랫동안 같은 각도로 내려앉았을 빗살 물결의 햇살까지. 좀 길다 싶은 기분이 들만큼 카메라는 이런 피사체에 집중한다. 마치 둘의 여행길을 끝까지 배웅하려는 듯, 마을 알고이 전체가 제 긴 목을 쭉 뺀다.

시선을 담뿍 받은 루디와 트루디는 행복하다. 그러나 여행 도중 트루디가 갑자기 떠나고, 루디는 알고이로 가뭇없이 돌아온다. 영화는 떠났던 길의 풍경을 되돌아 올 때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들과 시골길과 들꽃과 햇살까지.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 풍경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트루디다. 제법 길다 싶었던 출발 풍경 씬(scene)은 트루디가 빠진 귀가 풍경 씬과 자연스레 포개진다. 둘은 무심히 보면 복사본인데, 유심히 보면 필사본이다.

▲ ⓒ픽사베이

음악과 대사가 철저히 배제된 이 두 씬에서 보는 이는 크나큰 상실감을 경험하게된다. 부재로 인해 존재가 돋을새김을 하는 순간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다. 루디에게 트루디가 어떤 의미였고 어떤 존재였는지 영화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설득력으로 보여준다. 긴 침묵 속에서. 인상 깊은 것들을 대면할 때마다 라디오로, 소리로,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를 묻던 시기라 이 순간은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시각은 나머지 감각을 압도한다. 수용자의 반응도 빠르게 유도한다. 자극적이기도 하고 직접적이라 무례하기도 쉽다. 없는 것을 상상으로 채우기보다는 있는 것이 완성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라디오를 선호했던 것도 무의식중에 그런 특성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장면에서 라디오는 영상의 표현 지평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말 없음’으로 말 이상의 것을 라디오는 표현할 수가 없다. 다른 그 어떤 소리로도 이 상실감을 구현할 수가 없다.

한때 교과서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불현듯 곱씹게 된다.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침묵으로 무언가를 드러내야 할 때, 라디오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채우기보다는 비움으로써, 라디오는 더 큰 메시지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이 내게 남겨준 것들이다. 


박재철 C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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