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박재철 CBS PD] 트루디의 안색이 어둡다.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보를 방금 들어서다. 트루디는 늘 말했었다. “일본에 가보고 싶어. 후지산과 벚꽃을 당신과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어. 당신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 없어.”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암시 받는다. 둘은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오를 것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것. 두 가지는 곧 현실이 된다. 둘은 길 위에 서고, 둘 중 하나는 그 길 위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예감의 적중률은 5할이다. 길 위에서 사라진 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편 루디가 아니다. 그 사실을 ‘선고’ 받은 트루디였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은 관람 후 이런 저런 생각들을 꼬리 연결하듯 불러 모은다. 노부부의 자녀 탐방기를 담담히 그린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를 가져와 줄거리의 골자를 세운 것부터 그렇다. 잊었던 오즈의 영화를 떠올게 하고, 오즈의 어떤 점을 기리는 오마주인지를 고민케 한다.
거기다, 전작 <파니 핑크>에서 독창적인 미장센과 고유한 색감을 보여준 감독 도리스 되리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있다. 주제의식은 어떤가? 누군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시구의 참된 의미를 묻는다면, 뛰어난 영화는 분명 이런 식의 답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게 한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 그 당시 나에게 남긴 묵직한 과제가 한 가지 더 있다.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이기도 한데 라디오가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넘사벽’의 지점이다.
루디와 트루디는 독일의 조그만 마을 알고이(감독의 실제 거주지)에서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다. 영화는 따뜻한 봄날 알고이의 마을 풍경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의 평온한 얼굴과 그 얼굴을 꼭 빼닮은 비포장 시골길, 그 길에 무람없이 핀 들꽃들과 오랫동안 같은 각도로 내려앉았을 빗살 물결의 햇살까지. 좀 길다 싶은 기분이 들만큼 카메라는 이런 피사체에 집중한다. 마치 둘의 여행길을 끝까지 배웅하려는 듯, 마을 알고이 전체가 제 긴 목을 쭉 뺀다.
시선을 담뿍 받은 루디와 트루디는 행복하다. 그러나 여행 도중 트루디가 갑자기 떠나고, 루디는 알고이로 가뭇없이 돌아온다. 영화는 떠났던 길의 풍경을 되돌아 올 때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들과 시골길과 들꽃과 햇살까지.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 풍경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트루디다. 제법 길다 싶었던 출발 풍경 씬(scene)은 트루디가 빠진 귀가 풍경 씬과 자연스레 포개진다. 둘은 무심히 보면 복사본인데, 유심히 보면 필사본이다.
음악과 대사가 철저히 배제된 이 두 씬에서 보는 이는 크나큰 상실감을 경험하게된다. 부재로 인해 존재가 돋을새김을 하는 순간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다. 루디에게 트루디가 어떤 의미였고 어떤 존재였는지 영화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설득력으로 보여준다. 긴 침묵 속에서. 인상 깊은 것들을 대면할 때마다 라디오로, 소리로,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를 묻던 시기라 이 순간은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시각은 나머지 감각을 압도한다. 수용자의 반응도 빠르게 유도한다. 자극적이기도 하고 직접적이라 무례하기도 쉽다. 없는 것을 상상으로 채우기보다는 있는 것이 완성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라디오를 선호했던 것도 무의식중에 그런 특성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장면에서 라디오는 영상의 표현 지평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말 없음’으로 말 이상의 것을 라디오는 표현할 수가 없다. 다른 그 어떤 소리로도 이 상실감을 구현할 수가 없다.
한때 교과서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불현듯 곱씹게 된다.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침묵으로 무언가를 드러내야 할 때, 라디오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채우기보다는 비움으로써, 라디오는 더 큰 메시지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이 내게 남겨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