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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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돌아왔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21세기 산초와 함께하는 기묘한 여정
  • 신지혜 시네마토커(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 승인 2019.05.2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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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개봉한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PD저널=신지혜 시네마 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스페인의 작은 마을. 이곳에서는 지금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토비가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CF를 찍고 있다. 하지만 자꾸만 무언가가 어긋나고 시간만 흐르는데 은근슬쩍 압박을 가하는 보스가 나타나고 보스의 아내는 호시탐탐 토비를 노리고 있다.

의욕이 떨어진 토비는 우연히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졸업 작품을 보다가 ‘돈키호테’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던 구둣방 할아버지 하비에르를 기억해 내고 그를 찾아 간다. 그렇게 만나게 된 구둣방 할아버지는 영화를 찍은 이후 실제로 ‘돈키호테’로 살고 있었는데 토비를 산초 판사라 생각하고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

토비는 산초로서 ‘돈키호테’와 동행하게 되는데 마을의 큰 축제까지 겹치면서 현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고 뒤틀리면서 기묘한 상황으로 몰려간다.

돈키호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인물이다. 돈키호테가 어떤 인물인지 우리 모두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에게는 허황된 꿈을 꾼 사람일 테고 어떤 이에게는 어딘가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또 누군가는 진정한 기사도를 지닌 사람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기억할 수도 있다. 어쨌든 친근하지만 가깝지 않은 캐릭터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그의 영화를 인생작으로 꼽기도 한다. 그가 풀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고 그가 보여주는 독특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브라질>(국내에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출시됐다), <피셔킹>, <12 몽키스>, <그림형제-마르바덴 숲의 전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등 전작들을 떠올려 보라. 어딘가 기묘하게 뒤틀린 이야기의 얼개는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사소한 또는 중요한 어떤 것들에 의해 엇갈리고 뒤집힌다.

영화 한 편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 있는 일이다. 이 영화 속에서는 토비의 졸업작품에 출연했던 사람들의 인생이 바뀐다. 토비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천재 감독 소리를 들어가며 10년 간 승승장구 했지만 말이다.

돈키호테 역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캐스팅했던 구둣방 할아버지 하비에르는 영화를 찍은 이후 실제 돈키호테로 살고 있는데 하비에르의 말과 행동은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정말 정신이 나간 것일까. 어떻게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자신을 17세기의 기사 돈키호테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10년 전 미성년이었던 마을의 소녀 안젤리카는 영화에 작은 역으로 출연한 이후 삶이 급격하게 변한다. 10년이 흘러 나타난 안젤리카 때문에 토비의 혼란과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여기에 토비의 상사 보스와 그의 아내 재키, 마을의 집시 청년이 수시로 이야기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예기치 않은 시공간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 23일 개봉한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이야기에 우리는 왜 매혹당하는 것일까.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이야기들은 비유로 읽히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과장과 허풍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진지하기 그지없고 어떤 이야기들은 경쾌하다 못해 날아다닌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하고 이야기들의 재해석을 기대한다.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당연히) 세르반스의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영화 속 CF라는 장치를 심어 관객들을 허구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하비에르는 정말 스스로를 돈키호테와 동일시한 것일까, 아니면 연기인가. 하비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망상 속의 인물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영화의 종반부의 하비에르는 그 생각을 살짝 허물어버린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의 토비는 이런 의구심을 더욱 부채질한다.

하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우리 스스로가 이런 ‘돈키호테’의 모습을 일부분씩 닮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비에르에 비해 공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얼른 현실로 돌아와 버린다는 점이 다를 뿐 관객도 꿈을 꾸고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과연 누구의 꿈일까. 영화를 보는 관객의 꿈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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