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첫번째 문화읽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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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적 문화읽기
김정일
<김정일정신과의원 원장>

|contsmark0|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점은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의식은 말과 글이 발견됨으로 해서 발달하게 됐는데 그로 인해 인간은 여러가지 고통을 안게 되었다. 바로 영원히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다. 선악과는 어쩌면 말과 글일런지도 모른다. 말과 글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고통을 간직하게 되었고 또 자연과 어긋나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학자들 사이에 동물에도 고통이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은 분분했지만 내 생각엔 동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그에 대한 단적인 예로 우리들은 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어렸을 때의 고통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말하기 시작하는 3세 이전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없다. 아기의 손가락이 잘라지면 부모들은 마음이 너무 너무 아프겠지만 정작 아가는 곧 고통을 잊고 생글생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아픔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이다. 동물들은 인간의 지능에 비하면 대부분이 3세 이하일 테니 그들은 고통을 느끼기는 해도 인간같이 두고두고 간직하고 되씹으며 고통받진 않을 것이다. 또 동물들은 영생을 산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자연을 거역하지 않고 삶과 죽음을 맞기에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은 서로 연결된 하나일 것이다.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의식을 발달하고 강조해 고통을 간직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에게서의 죽음은 곧 의식의 소멸을 의미하며 그런 죽음은 인간에게서만 가능할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느낌은 무의식의, 생각은 의식의 주된 기능이기 때문에 느낌만을 간직한 동물들은 죽는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사나 생각을 하는 인간은 생각이 소멸되는 죽음을 맛봐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가장 축복받는 존재인 것 같지만 가장 저주받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핑크스는 인간에게서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일찍 죽는 것이라 했을 것이다.그렇다면 인간은 왜 고달프게 말과 글을 만들어서 고행을 자초한 걸까? 그건 신 같이 위대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신이 된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인간은 보다 크고 강한 에너지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휩쓸려 자연의 일부로서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신과 같이 자연을 지배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원(자연)에서의 추방도, 고통과 한정된 의식의 삶도 감수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계속 자연을 개척하고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풀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을 개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자연은 항상 알 수 없는 신비와 위험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을 개척하려면 그는 그만큼 강해져야 한다. 그 길은 바로 자기 무의식, 잠재 능력을 의식의 것으로 하는데 있다.인간은 자연의 일부, 우주의 일부로 태어났기에 인간의 몸 안, 정신 안에는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가 모두 담겨 있다. 자연과 우주가 무한한 것처럼 인간 또한 무한하다. 자기 내면을 탐구해 들어가 그 무한한 에너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자만이 외부 자연에 대해서도 그만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외적으로는 자기를 둘러싼 자연에, 내적으로 자기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무의식)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있어 불안하고 음울하고 위험천만이다. 그렇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리로 들어가는 것을 피할 길은 없다. 인간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강한 에너지, 욕심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기에 신에게 이르기까지 고행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그렇게 내면을 탐구해 들어가 완성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이(성불한 사람, 도통한 사람 등)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은 수준이 대중의 것이 되지 못함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은 모두가 각자의 힘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사람은 태어난 기운, 처한 환경, 받은 교육 등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자연에 적응, 개척하는 것도, 내면에 이르는 길을 지향함도 각자가 알아서 들어가야만 한다. 선각자들은 그저 자기들이 깨달은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만 있을 뿐이다. 그 내면의 심오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내면을 스스로 깊이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그를 급작스레 깊은 수준으로 안내하는 것은 아무 힘도 없는 아이를 컴컴한 동굴에 홀로 내팽개치는 것과 같다. 도인이라면 거기서 능력을 발휘해 살아남겠지만 아이는 헤매다 굶어죽고 만다. 그래서 선각자들의 지혜는 참고는 될 망정 그들이 뚫은 길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미로를 갖고 있다.그 깊은 내면의 탐구를 가장 안전하게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 과학문명이다. 과학문명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사람을 깊이 있는 성숙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문명으로 밝혀진 정신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는 아주 지천하고 미소할 뿐이다. 사람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게 된다.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문화이다. 그동안 정신과 자연에 대해 나름대로 도전해서 깊이까지 도달한 사람들의 시행착오, 깨달음들을 문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일깨워 준다. 궁극적으로 자연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는 진리의 핵을 가장 진실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의식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으로나 절대적인 믿음으로나 받아들일 뿐이다.물론 어떤 문화는 과학문명 이하를 맴돌기도 하고 종교 이상의 감동된 실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각자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들은 서로 비슷해지고 아주 깊이 들어가면 모두가 하나로 공통된다. 생명의 뿌리는 동일한 유전자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융은 집단 무의식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 인간 집단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 해서)이라 불렀다. 내면 깊이까지 들어가는 길을 그 당시의 사회에 걸맞는 방식으로 밝힌 자들은 문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환경이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자들이다. 솔직해야만이 기나긴 정신의 미로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들어가면 어떤 것들을 맞닥뜨리게 될까? 우선 무수한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의식’은 현실에서 견디기 힘든 것들이나 지나간 과거 경험, 당장 쓸모 없는 정신 에너지 등을 ‘무의식(잠재의식)’에 축적해 놓는다. 그래서 무의식에는 당장 현실과는 관련되지 않는 많은 에너지들이 잠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대개 감정의 형태로 응축돼 있다. 의식이 효과적으로 자기 에너지를 갈무리하기 위해 군더더기는 떨어버리고 엑기스만 억압해 놓기 때문이다. 그 감정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마치 우리 유전자의 dna나 rna의 단백질 구조가 서로 꼬리를 물고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 무의식 속의 감정들도 서로 꼬리를 물고 나선형으로 깊숙이 연결돼 있다. 유전자의 단백질 구조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음은 그래야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압축,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정신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억압한 무수한 감정덩어리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감정의 덩어리들은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기에(콤플렉스) 그것을 통과하면 많은 에너지가 방출되게 된다. 그때 터져나오는 감동은 비슷한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어린 시절의 부모형제 얘기에 쉽게 감동하는 것은 누구나 거쳐온 세월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내면의 감정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가 더 깊이에 존재하는 강한 감정들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감정들도 유전자 구조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커다란 생명 에너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깊은 감정까지 끌어올리게 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깊은 감정은 아마도 사랑과 한, 초월적인 감정일 것이다.사랑은 인간의 자기 복제를 위해, 한은 자연계에서 버티고 헤쳐가기 위해 원시시대 때부터 축적돼왔을 것이고 초월적인 감정 속에는 자연과 우주의 신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핵심 감정을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절묘하게 끌어내면 가히 폭발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러브 스토리’, ‘사랑과 영혼’, ‘타이타닉’ 등이 그러할 것이다. 문화가 이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려면 문화의 공간에는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각자의 수준에 맞는 다양한 시도가 허용돼야 그들은 보다 깊이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되는 식으로 문화를 규제하면 그는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어둠 속에 떠있는 감정 덩어리들을 소화하지 않고 외면하고 들어갔다가는 뒤에 있는 감정들에 두고두고 뒤통수 맞고 발목이 잡혀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나는 성자나 영웅, 위인들의 근사하게 포장된 이야기를 잘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근사해지기 전에 누구보다도 지저분한(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길을 용기 있게 뛰어들어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런 아름다운 초월의 수준에 닿을 수가 없다. 우리 문화가 보다 다양하고 활짝 피어나려면 솔직한 도전, 느낌, 탐색을 마음껏 허용하는 자유로운 사회 제도적 분위기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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