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 KBS 개혁실천 특별기획 [5·18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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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 KBS 개혁실천 특별기획 [5·18 광주민중항쟁]
5월 광주는 물었다 -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류지열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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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80년 5월 광주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마비된 이성과 왜곡된 상식에 빠져 있던 우리 사회에 대 파열구를 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해 5월을 겪으면서 우리는 권력의 본질을 알았고 미국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18년 동안 5월 광주는 우리 사회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자양분이었다. 때문에 5월 광주를 방송하기에는 그 역사적 무게가 너무나 버거웠다.분단국가에서 국군에 대항하여 무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번연히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총을 들었던 광주의 분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그 밤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붙잡는 사람도 없었는데 끝까지 남아 도청을 지키던 젊은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말해 줄 것인가! 더구나 5월 광주는 이제 매듭이 지어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무엇을 말할 것인가. 가닥을 잡기가 힘들었다. 방송 후 반응이 제작과정의 고민이었기에, 그것을 통해 제작과정을 말하고 싶다. 여러 가지 반응들 중에서 비판적인 시각들, 특히 겸허히 받아들이기에는 고민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에 대한 제작자의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차후에 5월 광주를 준비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비판적인 의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기했던 것은 ①새로운 것이 없었다 ②전두환씨에 대한 최근의 근황이 담기지 않았다 ③감정적이었다 ④화면이 잔인했다 등이었다.새로운 것이 없었다는 비판은 방송 준비할 때부터 많은 분들이 우려를 했던 점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5월 광주를 부분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종합적이고 통사적인 관점에서 제작하기로 방향을 잡았을 때 이미 예견을 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암매장이나 피해자 누구 또는 개별 사건 등의 미세한 접근을 통한 발굴취재를 배제하였던 것은 광주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식자층(대졸 정도)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진상에 대해 파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취재를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5월 광주에 대한 방송목록을 살펴보아도 총체적인 광주에 대한 접근이 [광주는 말한다] [어머니의 노래] 정도 이외에는 지난 18년 동안 없었던 점도 충분히 고려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접근 방법의 문제를 떠나서 보다 중요하게는 애초에 제작자의 입장에서 광주 이야기에서 ‘새로운’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던 발포권자의 문제를 살펴보자(현실적으로 그것은 청문회나 재판과정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문제였다). 총을 누가 쏘라고 명령했는가 하는 그 끝없는 미로를 찾아 헤매다 보면 자칫 문제의 본질이 흐려질 가능성이 실재한다. - 물론 밝혀낸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총을 쏠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 신군부 핵심의 움직임을 정리함으로써 학살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5월 광주에서 진정 새로운 것이란 불 의한 국가 권력이 악랄한 학살을 자행할 때 총을 들어서라도 반란군으로부터 헌정질서를 지키려고 했던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의 처절한 항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었으며, 80년 5월 이후 18년 동안 오로지 수면제와 마약성 진통제에만 의존해왔던 부상자의 고통(그들은 지금도 매달 한 명 꼴로 죽어간다.)과 행방불명자 가족의 애절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전두환씨에 대한 최근 움직임에 대한 취재가 없었음에 대한 지적은 제작팀에게도 많은 아쉬움이 있는 부분이었다. 운동장에서 공 차고, 절에서 설법하고 고향에서 술잔을 나누고 다니는 전씨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빠듯한 제작 일정 속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부상시킨 그는 분명히 학살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돌을 던지기 이전에 우리에게 먼저 묻고 싶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광주 문제를 역사에 맡기자고 했을 때, 그리고 작년 전씨가 사면되어 나왔을 때(소설가 임철우씨는 이 점에 대해 광주 시민들은 용서할 기회도 빼앗겨 버렸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5월 광주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런 역사의 반동적 흐름에 대해 냉소와 무관심으로 흘려 버릴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저항을 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전씨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5월 광주에 대한 우리 모두의 진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감정적이었다는 이야기, 참 곤혹스러운 비판이었다. 통곡, 절규, 욕설, 구호가 난무해서, 내레이션의 직설적 단정 때문에, 의도적 화면 구성 때문에….제작자로서 냉정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었던 것 같다.마지막으로 잔인한 장면에 대한 비판이다. 어린이나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삭제해야 되겠지만, 5월 광주의 진실을 진단하는 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가장 정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대로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현실적으로 방송 시간대가 밤 10시 이후라는 점과, 총 맞은 임산부의 배 안에서 태아가 30분 이상이나 뛰고, 처녀의 가슴에 대검이 꽂히고, 꼬마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죽어갔던 참혹했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단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그 정도 사진을 방송하지 못한다는 것은 5월 광주에 대한 감정의 사치라고 판단했다.이상은 방송 후 긍정적인 평가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비판들 이외에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한 비판들에 대한 정리였다. 변명처럼 보여 부끄럽기도 하지만 5월 광주는 이제 세세년년(歲歲年年) 방송하여야 할 것이기에 같이 생각해보자는 뜻이라고 읽어준다면 좋겠다.어떤 프로그램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방송을 마치고 난 다음에 드는 아쉬움과 자책감을 쉽게 달래기 어려웠다. 한 달여 시간 속에 전쟁을 치르듯 초조하게 작업을 하다보니 놓친 게 너무나 많았다. 취재과정에서 어렵게 만난 당시의 군 관계자가 행방불명자 문제에 대해 말할 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저히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어 버렸을 때 좀 더 제작기간이 있었다면 설득이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소설가 임철우씨는 5월 광주에 매달려 10년의 작업 끝에 장편소설 ‘봄날’을 다 쓰고 난 다음 “세상 사람들아, 제발 내 소설 좀 읽어다오. 돈 안 줘도 좋으니 제발 광주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라고 쓴 플랭카드를 들고 온 세상을 뛰어다니고 싶었다고 했다. 방송을 끝내고 나니 임철우씨의 그 애절한 당당함이 참 부러웠다.이 방송을 통해 5월 광주의 장엄한 정신이 지역의 벽을 넘어 이 땅 곳곳의 5월 정신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참 그리고 작은 위안 하나.‘광주대학살’이라는 애초 제목은 끝내 못 내보냈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민중항쟁’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5월 광주를 자리매김 했다는 것.|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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