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첫번째 문화읽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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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서동진
(문화평론가>

|contsmark0|현대를 다시 보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현대를 다시 보자는 주장이 지금 여기에 특별히 유별나게 시작된 건 아니다. 언제나 동시대에 대한 질문은 있었고, 그 질문은 그만큼 중요했고 또 절박했다. 하지만 지금 현대에 대한 질문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현대에 대한 질문은 주어진 역사의 결과를 검토하는 일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현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혐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리키거나 설명하려는 시도에 다름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라 우리가 불러왔던 그 무엇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었다. 즉 현재라는 개념은 역사라는 개념과의 짝이었고, 또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각 개념은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둘의 관계는 긴밀했다. 결국 현재를 다그치는 일은 현재의 오류와 폐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었다.그러나 지금 현대에 대한 질문은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역사라고 불리우는 담론,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체험과 의식 속에 스며들어있는 사건들의 필연성에 대한 연대기와 그를 관류하는 합리성 혹은 이성의 간지(奸智) 운운의 것들을 비판하려 애쓴다. 이는 현대의 오류와 폐해를 비판하려는 것을 넘어 현대란 독특한 태도와 관점에 대한 비판이다. 현대가 없다면, 즉 지금이라는 사고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존하여 사고하고 또 세계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인가. 단적으로 현재가 없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을진대 그렇다면 미래를 담보로 이뤄지던 그 숱한 현재에 대한 비판 - 지금의 자본주의 이후, 지금의 식민주의 이후, 지금의 지배 이후, 지금의 억압 이후 등등 - 은 어떤 수로 가능할까.그렇지만 이러한 현대에 대한 물음은 현재를 지우려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물음은 현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단지 통일된 그 전체로서의 과거, 대문자로 쓰여진 그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각각의 제도와 사회적 관습은 무수하게 다양한 자신의 계보들을 갖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를 다시 본다는 것은 현대를 지배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태도와 감정 그리고 그를 보증하고 연장하는 사회적 실천들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이를테면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차이로부터 초월한 보편적 시민이란 생각, 앎의 능력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보편적 인간이란 이성중심적 생각 등등이 이러한 비판에 회부된 생각들이다.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판에 착수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또 자칫하면 비판하려는 것의 경계 내에서 머무는 일이 될 수 있음 역시 깨달아야 한다. 현대에 대한 비판의 충동으로 이뤄진 숱한 시도들이 저지른 사이비 회의주의(역사의 종말론 따위)와 더 단단한 외피 속의 현대로의 회귀를 우리는 누누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섹슈얼리티의 현대에 대한 질문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섹슈얼리티는 지금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현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 계보를 추적하는 순간 그것의 우연성과 일시성이 무엇보다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종과 생물학적 필연으로서의 성, 억압된 본능과 그 충동적 본능의 승화에 기반한 문명 혹은 사회, 나이와 성별에 따른 자연스런 삶의 질서로서의 성이라는 담론의 모델 모두가 불과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요지부동의 초월적 신념이 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섹슈얼리티는 현대에 대한 계보적 비판을 위한 최선의 통로는 아닐지라도 가장 적절한 통로 가운데 하나임엔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나 안토니 기든스 (anthony giddens), 울리히 벡 (ulrich beck)같은 현대의 비판적 검토를 주장한 이들의 한결같은 생각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현대를 통해 만들어진 성의 대표적인 모델 몇 가지를 꼽아보면서 성의 현대적 계보를 간략히 예시해 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는 생식과 재생산 (reproduction)으로서의 성, 즉 번식과 출산, 가계로서의 성이란 모델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출산을 하고, 이를 위해 특정한 나이에 들면 이성과 성적인 결합을 하게 되며, 우리는 이것이 모든 인간사의 숙명인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성의 모델이야말로 극히 현대적이다. 이러한 부부의 모델로서의 성은 무엇보다 국가 그리고 사회와 깊은 상관이 있다. 이를 위해 인구란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멜더스적 부부(푸코)란 개념으로 부르기도 한 이 모델은 그 엉뚱한 이름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알다시피 멜더스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의 행복과 부를 그 사회의 인구의 증감과 관계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물론 그 주장은 더 이상 옳지 않은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의 효력은 여전하다. 줄여 말해 이런 모델을 통해 사회와 성을 잇는 연결선이 만들어졌고, 이 이음선을 통해 사회는 우리에게 성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을 만들어주었으며, 또 이를 통해 우리의 성을 하나의 텍스트처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사회는 인구의 조절과 통제 혹은 인구의 관리 - 국민의 건강과 행복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사회적 관리가 그러하듯 - 라는 규범 아래에서 우리의 성을 낱낱이 조사하고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며 또 해독하고 비축한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남과 더불어 주민등록번호를 받고, 호적에 등재되며, 병역의무와 사회보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국가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제도에 비쳐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구적) 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코드화하고, 또 사회는 그 코드에 따라 우리를 읽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동시에 성이란 생식과 재생산에 다름 아니란 우리 모두의 생각을 버팅겨온 핵심적인 지주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가족과 친족체계가 성의 기본적인 원칙이며 또 목적이라는 생각은 인구란 생각이 낳은 부산물 혹은 그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면 그에 수반하는 사고에 다름 아닌 것이다.이는 바로 다음의 현대적 성의 모델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어떤 역사학자는 현대를 아동의 세기라 불러 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아동기 (childhood)라는 독특한 인생주기의 발명에서 찾은 바도 있다. 이 말은 현대 이전의 시기에 독특한 감정과 태도, 행동양식, 자아에 대한 태도로서의 아동기란 것이 없었음을 이른다. 사실 우리가 지금 아동기와 그 이전, 이후를 가르는 시기 즉 성인기나 노인기, 사춘기 등은 지극히 현대의 어휘목록에 들어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아동기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성과 연관하여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아다시피 아동기는 서구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예외없이 성적인 순진무구 (innocence)로 특징지워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동기라는 정의의 핵심엔 그것이 성이 부재한 시기, 혹은 성 이전의 시기란 생각이 짙게 묻어있다. 그런 점에 비춰보면 아동기는 무엇보다 현대적 성담론의 커다란 지주 가운데 하나이다. 즉 우리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 성에 눈뜨게 되며, 성에 적합한 육체 - 예컨대 생리, 2차성징의 발현, 왕성한 성욕의 등장 등의 유사의학적, 생물학적 모델을 상기하라 - 를 발달시키게 되며, 또 그에 따라 성과 자신의 행동을 결합시키는 여러 가지 규칙 - 결혼적령기, 성인관람가 등의 법적, 문화적 모델 따위를 상기하라 - 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연령주의 (ageism)이라 불리우는 나이의 구분에 기반한 인간의 모델이 다름아니라 또한 성의 현대적 모델이며 또 이것이 앞서 말한 생식과 성의 모델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즉 결혼과 가족의 성이 특권화되기 위해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성은 주의 깊게 관리되고 또 통치되었으며, 성인기의 성 역시 생식을 중심으로 풀이되고 설명되며 또 보호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성의 경우 이 점에서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경우 성의 발달은 전적으로 생식능력의 발달로 환원되어왔으며, 협소한 의미에서 성 즉 관능적인 성에 각별한 관심을 가질 경우 매춘부나 정신병자 같은 특별한 인간형으로 분할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성에 따라 각각의 인간군을 분리하고, 그에 따라 그의 행동과 감정, 태도 따위를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을 찾는 관점과 깊이 잇닿아있음은 물론이다. 잘 알다시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정의하고, 이러한 각각 서로 다른 성정체성으로부터 개별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또 그에 준거해 자신을 설명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와 연루되어 있다.물론 이외에도 우리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다른 현대적 발명품 역시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흔히 성도착이라 불리우는 성의 이종(異種)들은 모두 이성이란 성대상과 성기적인 결합을 통한 쾌락이란 성목표로부터 벗어난 이들을 따로이 부르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인간의 종들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절편음란증이나 주물애자라 부르는 성도착자들은 생식기를 통한 정상적인 성적 쾌락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동성애자들은 이성이란 성적 목표에 이르지않는다는 죄목으로 각기 하나의 인간형이 되었다. 물론 그 목록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런 인간형에 따라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하였다. 단적으로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는 그러한 인간형이 공통의 삶의 관습과 문화를 형성하여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이처럼 극히 간단하게 짚어본 예처럼 현대는 전혀 다른 성의 형태와 종들을 발명하였고, 또 그와 조응하는 여러 감정과 태도, 지배의 규칙과 절차들을 마련하여왔다. 생식과 이성애, 성인, 오르가즘의 성을 특권화하고 이에 준거하여 성을 분류하는 도식을 생산하였으며, 또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사회적 제도와 원칙을 쏟아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모두 한결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또 빈틈이 없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현대의 인간을 설명하던 가장 강력한 담론 가운데 하나인 성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적 탐구는 충분히 현대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회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기원과 본질에 대한 탐구의 방식을 수정하고,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배되어왔나라는 탐구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성의 현대성은 우리라는 주체성이 어떻게 발명되었는지를 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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