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 보다 소중한 노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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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명분에 혹사당한 방송 노동자들...방송계 정당한 보상 풍토 정착돼야  

드라마 촬영 현장 모습(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MBC
드라마 촬영 현장 모습(이 사진은 칼럼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MBC

[PD저널=허항 MBC PD] 유럽이나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으로 촬영을 가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된다. 제작비 걱정 때문이다.

일단 해외촬영 자체가 꽤나 많은 제작비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인데, 그런 곳에 가면 늘 정해진 예산 이외에 또 돈을 써야할 일이 꼭 발생한다. 해외 지리를 잘 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정해진 촬영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현지 스태프를 고용해야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가장 무서운(?) 건 인건비 폭탄이다. 몇 년 전 프랑스로 촬영을 갔을 때, 렌트한 버스를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넘겨서 사용했는데, 상상 이상의 추가요금이 나와 패닉에 빠진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현지 스태프 고용료가 한국 수준을 크게 웃돌아 당황하기도 했다.

딜이란 건 불가능했다. 그들 나라에서 ‘조금 깎아주세요’ 혹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음에 잘 해드릴게요’ 등의 멘트로 뭉개려다간 망신당하기 일쑤다.

 방송계가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코앞에 두고 있다. 내가 있는 예능본부도, 새로운 법에 어떻게 적응해가야 할지 매일매일 골치 아픈(?) 토론의 장이다. 재량근로제, 선택근로제 등의 방안이 거론되고, 인력을 충원하거나 제작비를 늘리자는 등의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예능 노동의 현실과 다소 상충돼 보이는 법 내용 때문에 시행 이후에도 한동안은 순탄치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당장 불편하다고 해서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수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치더라도, 꼭 정착되어야 할 법이다. 

방송계는 유난히 ‘인건비’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 인건비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나를 포함해 많은 PD들은 ‘좋은 작품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자위 해가며 스스로와 스태프를 혹사시켰다.

조연출은 월요일에 캐리어를 끌고 편집실로 출근해 일요일에 반쯤 기절한 상태로 퇴근을 하고, 카메라팀 보조가 몇 주째 제대로 못 자고 메모리를 변환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촬영이 끝나면 삼겹살에 소맥을 돌리면서 감정적인 보상을 꾀하려 했지만, 공식적으로 정산되는 그들의 인건비는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스스로도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장시간 촬영과 편집 후에 그것에 대한 경제적인 리워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좋은 시청률이나 뿌듯한 감정 같은 추상적인(?) 대가로 자족했을 뿐이었다. 톱 연예인들의 인건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지만, 방송 노동자들의 노동은 물가 대비 끊임없이 폄하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열정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좋은 작품 하나 남기면 되는 거지’ 같은 무책임한 멘트들 속에 말이다. 

단 10분 만 초과돼도 칼같이 운전기사의 초과노동수당을 요구하던 프랑스나, 예상했던 단가의 다섯 배 쯤의 스태프 일당을 요구하던 미국에서 속으로 ‘너무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나 역시 후진국형 노동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해진 기준보다 더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고, 그 보상의 규모 역시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는 시작점에 서 있는 것이다.

‘헝그리 정신’으로 ‘노오오오력’ 하다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가치관을 주입받은 세대라는 소심한 변명은 이제 과감히 접어 넣어두어야 할 때다. 물론 현장에 있다 보면, ‘(이미 정해진 시간이 다돼가지만) 한 컷만 더 찍었으면 좋겠다’, ‘(같은 비용 안에서) 조금만 더 높은 퀄리티를 얻고 잎다’ 같은 욕심이 생기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프로그램 퀄리티에 앞서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는 게 바로 ‘주 52시간 근로제’의 취지다. 사실 퀄리티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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