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죽음에 무치한 어른들
상태바
아이들의 죽음에 무치한 어른들
[비필독도서⑮]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9.06.17 13: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8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잔인한 게임-여고생 집단 성폭행 사망 사건의 진실’편. ⓒSBS
필자가 연출을 맡은 지난 8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잔인한 게임-여고생 집단 성폭행 사망 사건의 진실’편. ⓒSBS

[PD저널=오학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PD] ‘모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모른다는 것은 수동적일 수 없다. 매일이 지옥과도 같던 취재 기간 동안 깨달은 말이다.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었고, 또는 알아야만 했고, 어쩌면 알고 있지만 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이들이 무심코 내뱉는 '모른다'는 말들을 주워 삼키며 ‘모르는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을 떠올렸다. 아이는 죽기 전에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죽어서도 혼자였다.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만 하며 누구도 아이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지 않았다.

방송을 마치고 한동안 누워만 지냈다. 그만큼 고통스런 취재였다. 한 아이의 죽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늘어놓는 말만 곱씹어도 한나절 충분히 아프고도 남았다.

취재하며 동네에서 만났던 어른들 다수는 어째서 그 아이가 자기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이고 기억 저편으로 미뤄둔 일들을 왜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동네를 시끄럽게 하냐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어른도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아이의 죽음은 '몰라야 하는' 어떤 부끄러운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신간 서가에서 집어 들었던 건 우연이었지만 그의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게 된 건 필연에 가까웠다. 겸손한 목격자로서, 세상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기억의 수면 위로 길어 올리는 이 책만큼 아이들이 마주하는 위태로운 절벽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가움, 그리고 동시에 비애를 느꼈으니 말을 보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은 작가가 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작가가 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이 책은 어린 노동자들의 죽음과 그 노동자 아이의 주변 사람들의 생각들을 다룬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린 노동자들이 기계에 끼이고, 휘두르는 선배의 주먹에 맞고 옥상에 오르고 있었다. 자식이 세상을 등진 후에야 자기의 생때같은 아이가 세상의 가장 위험한 곳에 있었다는 걸 깨달은 부모는 가슴에 아이를 묻어두고 일상을 잃었다. 저마다의 죄의식을 품은 주변의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이의 죽음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한 아이는 공장의 기계가 멈추면 기계 속으로 들어가 수리해내는 중요한 일을 맡았지만 정작 회사는 그 아이를 쓰다가 말 학생, 비정규직 실습생으로만 기억한다. 그들이 시키는 일이 그 아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그 아이가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막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잘못도 없이 또 다른 아이가 뺨을 맞을 때에 직원들은 옆에 서서 그저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회사도, 학교도, 가족도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작가는 아이들이 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이 그곳에 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그들이 그곳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동안 많은 어른들이 보여준 무관심, 그리고 허공에 흩어진 몇몇 사람들의 안타까운 노력들을 최대한 덤덤하게 묘사한다. 완전히 덤덤해질 리 없지만 그렇다고 비난의 화살을 돌릴 희생양을 찾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아이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그리고 우리가 언제까지 '모르는 척'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단순한 행위가 아니어야한다. 흔적처럼 남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필사적으로 끌어 모으는 것은 그것만이 유일하게 떠난 아이들을 사람으로서 대접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목격자의 기억은 망각을 요구하는 무책임한 어른들을 가장 부끄럽게 할 수 있는 저항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은유 작가는 모두가 은근히, 어서 지워내길 바라는 상흔들을 똑똑히 기억하길 요구한다.

특성화고가 ‘마이스터고’라는 번듯한 이름을 얻고, 취업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새로 늘어난 문들은 왠지 하나같이 부실하다.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사고라도 나면 회사는 그 아이는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위험이 회사의 몫이 아니라 노동자 개인의 몫이 되는 동안 아이들은 생계를 위해 조용히 그 짐을 떠맡는다. 육중한 기계와 두꺼운 철문이 아이들을 세계에서 지워낼 때마다 어른들도 기억에서 아이들의 죽음을 지운다. 

작가는 누가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돌려 묻는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안다. 기억을 지우는 건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종종 '사람은 잊어야 산다'고 말하며 인생을 먼저 살아간 사람으로서 조언한다. 거대한 재난,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휘청거리는 삶이 쓰러지면 안 된다는 동정심의 발로일 것이다.

하지만 잊는 데에도 적절한 방법이 있다. 역설적으로 기억은 망각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저 잊으란 말의 주어는 남겨진 사람이 아닌, 책임이 드러날까 초조한 내 자신인 경우가 많다.

‘당신이 침묵해야 내가 산다. 그래야 그동안 침묵해 온 내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괄호 속으로 사라지는 말들이 표정 위에 떠다니던 경험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방송이 목격자가 될 수 있다면 그런 무치한 자들의 무지하려는 시도들에 계속 질문을 보탬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은유 작가의 일이나 우리의 일은 사람들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며 모르고자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과연 내가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질문으로 남겨둔다고 해도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