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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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날'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삶에 대한 관조 돋보이는 작사가 박주연의 노랫말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07.10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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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3일 '작가사 박주연' 특집으로 꾸민 KBS '불후의 명곡' 방송 화면 갈무리.
2018년 5월 26일 '작가사 박주연' 특집으로 꾸민 KBS '불후의 명곡'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박재철 CBS PD]  “눈에 그려지듯 쓴다.” 묘사에 대한 풀이다. 묘사란 물감이 아니라 말로 그리는 것이다. 언어로 시각화하는 일이다. 

이 묘사에 능한 작사가를 떠올릴 때 박주연이 빠지면 좀 허전하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양손에 쥔 가사들이 적잖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머릿속에서 스틸 컷 몇 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노는 아이들 소리/저녁 무렵의 교정은/아쉽게 남겨진 햇살에 물들고/
메아리로 멀리 퍼져가는/꼬마들의 숨바꼭질 놀이에/ 
내 어린 그 시절/커다란 두 눈의 그 소녀 떠올라/

<가려진 시간 사이로>

방과 후 저녁놀에 물든 교정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정경이 한 눈에 그려진다. 아름답고 평화롭다. 파스텔 톤으로 잔잔히 퍼지는 어린 시절이다. 

풍경묘사 하나로 그때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군더더기 없는 가사다. 유년은 가려진 커튼 뒤에서 넘실대는 햇살을 닮았다. 아련하고 아스라하다. 그 시간 속에 머물기만 할 것 같은 소년은 어느 샌가 사랑에 눈뜬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뭐가 그렇게도 좋았었는지/우리들만 있으면/
너의 집 데려다주던 길을 걸으며/수줍게 나눴던 많은 꿈/

<오래전 그날>

너의 집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그 길 끝에서 등 돌려 나의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 또다시 함께 선다. 헤어지기 싫어 그렇게 또 몇 번을 오고 갔을 어느 봄밤의 길.

달빛 아래에서 조심히 꺼내 나눴던 서로의 꿈. 들뜨기도 했고 비틀 거리도 했던 청춘의 어느 비탈길에서 너와 내가 서성거렸던 숱한 시간들. 그리고 연정(戀情)의 추억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손 흔드는 사람들 속에/그댈 남겨두긴 싫어/...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 위로/

<입영열차 안에서>


그의 가사는 많은 경우, 상황 툭 던지며 시작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 ‘그곳’으로 청자(聽子)를 데려다 놓고는 한참동안 그 분위기에 머물게 한다. 

입영열차 안, 엄습해 오는 단절감과 내무반을 감싸는 모포보다 두꺼운 외로움, 오래전에 그 공간을 경유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노래는 조용히 불을 지핀다. 

1인칭 시점으로 일기를 쓰듯 써내려간 가사는 과거 내 일기장의 어느 한 페이지를 들춰보는 기분을 들게 한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병영생활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그러나 마침표는 끝이 아니다. 삶을 묘사할 새로운 문장의 시작을 알릴뿐이다.  
 

어떤 약속도 없는 그런 날엔/너만 혼자 집에 있을 때/ 
넌 옛 생각이 나는지/그럴 땐 어떡하는지/
또 우울한 어떤 날/비마저 내리고/ 
늘 우리가 듣던 노래가/라디오에서 나오면/ 
나처럼 울고 싶은지/왜 자꾸만 후회되는지/ 
나의 잘못했던 일과 너의 따뜻한 마음만 더 생각나/ 

<나와 같다면>

너와 함께 했던 방, 이제는 나 혼자다. 너의 크기만큼 너의 부재로 인해 커진 방. 그러나 난, 큰 쟁반에 담긴 좁쌀만큼 작아져 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다. 만남과 이별은 한몸이다. 비는 내리고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듣던 익숙한 멜로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방의 공허함이 내 마음의 공허함과 포개지고 있어야 할 존재가 없어진 그 자리에는 이내 회한과 애틋함이 채워진다. 그렇게 사랑앓이는 혹한처럼 다가오며 긴 성장통을 동반한다. 시간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뭇없이 제 갈 길로 흘러갈 뿐이다.   


언젠가/마주칠 거란 생각은 했어/한눈에 그냥 알아 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변한 게 없는 너/...  
먼 훗날 또 다시/
이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그때도 알아볼 수 있을까/

<사랑이 다른 사람으로 잊혀지네>


회자정리였던가 하니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다. 여러 겹으로 굴곡진 인생사 어느 굽이에서 뜻하지 않은 재회는 또 이렇게 예비 돼있던 거다. 헤어지고 난 후에 부질없이 떠올린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선가, 우연히 마주칠 거란 부질없는 생각. 그때 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건네야 가장 자연스러울지, 아니, 그보다는 세월이 지나 변한 너를 제대로 알아보기나 할는지... 기우였다. 변한 모습 속에서도 변한 게 없는 너를 금세 찾아내는 나. 

그의 노랫말을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의 서사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만큼 공통분모에 속하는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하나의 상황 묘사만으로 그 상황을 겪은 이에게 당시의 감정을 추체험하게 한다. 공감을 탑재한 묘사력 덕분이다. 박주연의 가사는 노랫말의 본령인 가사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서도 빛을 발한다. 두 대목만을 꼽아본다.


옛 얘기하듯 말할까/바람이나 들으렴
거품 같은 사연들/서럽던 인연 

<옛이야기>

‘옛 애기하듯 말한다’는 건 어떤 걸까. 대수롭지 않게 꺼내지만, 만만치 않은 내용이 담길 거란 예감이 깃든 말 걸기 방식. 바람에게 이야기하듯 무심히 건네지만, 마음 한켠에는 그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길 원하는 마음의 한 자락. 때론 덧없음이 또 때론 애달픔이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직조되어 있을 법하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곱씹어보면 이런 저런 다양한 맛을 함의한 가사다. 

나는 떠날 때부터/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철학은 ‘자기 삶에 거리두기’라고 말하던데, 그는 노랫말을 쓰면서 조용히 삶을 관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이라는 부사가 깨달음의 그 긴 여정을 넉넉히 설명한다. 무언가를 찾아 떠돌기만 했던 나다. 아니 우리들이다.

이젠 ‘국화 옆에서’ 선 시인처럼 떠난 자리로 되돌아와 보니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 성찰의 순간이 찾아온다. 축약컨대, 파랑새는 먼 곳이 아닌 바로 당신 옆에 있다는. 이 사실,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좋으련만. 

처음으로 돌아가 가사를 한 번 더 음미해보니 불쑥 이런 생각이 든다. 파랑새는 출발선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새는 아닐까? 먼 길을 에둘러,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귀환자의 지친 어깨에만 날아와 살포시 앉는 그런 새는 아닐까? 

그러니 ‘이젠’이라는 부사를 쓸 수 있는 헤맴과 방황의 시간은 필수불가결이며, 단숨에 건너 뛸 수는 없는 너비의 강인지도 모르겠다. 노랫말에 삶의 지혜와 희로애락을 세련되게 담을 줄 아는 작사가 박주연. 아름다운 선율에 얹힌 그의 솜씨를 오랫동안 감상해 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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